[한정주=고전연구가] 인간의 삶을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고 가는 힘의 실체가 운명인지 아니면 의지(능력)인지에 대해 질문하면 아마도 운명의 편을 드는 사람과 의지(능력)의 편을 드는 사람이 한 치의 양보 없이 팽팽하게 맞설 것이다.
대개 운명의 힘을 편드는 사람은 운명이란 이미 결정돼 있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와 능력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또한 운명은 결정돼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해석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 의해 예측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운명의 힘을 믿는 사람이 운명학, 즉 사주명리학, 점성술, 타로점 등에 더 의지하는 이유 역시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운명을 바로 보는 관점은 결정론, 불변성, 확정성, 필연성, 예측성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의지와 능력의 힘을 편드는 사람은 운명이란 결정돼 있지 않고 인간의 선택과 행동(행위)에 의해 변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운명은 결정돼 있지 않고 만들어져 나가면서 바뀌기 때문에 애당초 예측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사람들이 운명을 바로 보는 관점은 비결정론, 즉 선택론과 행동론, 가변성, 불확정성, 우연성, 불예측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운명의 힘과 의지(능력)의 힘을 둘러싼 팽팽한 힘겨루기는 아주 오래전 고대 중국의 도가 사상서인 『열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열자』는 『노자도덕경』, 『장자』 등과 함께 도가 사상의 3대 경전이라고 불릴 만큼 중요한 고전 중 하나이다. 이 책은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인간의 생사와 부귀와 빈천은 운명에 달려 있는가, 아니면 능력에 달려 있는가?” 운명과 능력의 논쟁을 한번 들어보자.
▶ 능력 : “사람의 장수와 요절, 부귀와 빈천은 모두 나의 힘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 운명 : “만약 능력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라면 어째서 재주 없는 사람은 장수하는 반면 재주 있는 사람은 요절하는 것인가? 어찌하여 어진 사람은 곤란한 지경에 빠지는 반면 사람의 도리를 거스르는 자는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것인가? 어찌하여 착한 사람은 빈천을 벗어나지 못하는 반면 악한 사람은 부귀를 누리는 것인가?”
▶ 능력 : “만약 그대 말대로라면 나는 본래부터 인간사와 세상사는 물론 온갖 사물에 대해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는 셈이군. 그렇다면 세상 모든 일과 온갖 사물이 그렇게 되고 있는 것은 순전히 그대 운명 때문이라는 말인가?”
▶ 운명 : “이미 운명이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운명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달리 있겠는가? 나는 곧은 것은 곧은 대로 밀고 굽은 것은 굽은 대로 놓아둘 뿐이다. 장수하는 것도 스스로 그렇게 만든 것이고 요절하는 것도 스스로 그렇게 만든 것이다. 스스로 궁색한 지경에 처하게 되고 스스로 자신의 뜻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 존귀해지는 것이고 스스로 미천해지는 것이다. 또한 스스로 부유해지는 것이고 스스로 가난해지는 것이다. 모든 것이 스스로 그렇게 되는 것인데 나 운명이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겠는가?”
열자는 장자보다 약간 앞선 기원전 400년경 활동한 인물로 추정된다. 이미 2500여년 전 제자백가(諸子百家) 사이에서 뜨겁게 다루어지고 있을 만큼 이 문제는 오랜 세월 사람들에게 최대 관심사이자 논쟁거리 중의 하나였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 오래된 논쟁의 저울추를 따져본다면 근대 사회 이전에는 운명의 힘을 편드는 사람이 절대다수였고 의지(능력)의 힘을 지지하는 사람은 특정한 소수였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근대 사회 이전에는 인간이 자신의 의지(능력)로 삶을 통제하고 운명을 바꾼다는 것은 100%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아니었지만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 사회처럼 신분과 계급이 지배하는 경우 한 개인의 운명(삶)은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은 신분과 계급에 의해 결정된다. 거기에는 개인의 의지와 능력이 개입될 공간이 극도로 제한적이다. 왕족은 왕족의 운명을, 귀족은 귀족의 운명을, 양반은 양반의 운명을, 노예는 노예의 운명을, 노비는 노비의 운명을 지니고 태어나며, 그것은 개인의 의지와 능력으로는 결코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운명이 변화한다고 해도 왕족과 귀족은 그 운명의 경계 안에서, 노예와 노비 역시 자기 운명의 영역 내에서의 변화에 불과할 뿐 신분과 계급에 의해 부여받은 운명의 경계를 넘어 자신의 운명을 바꾼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철학사나 사상사의 차원에서 볼 때 운명의 힘에 대한 의지(능력)의 힘의 본격적인 반격은 신분과 계급 질서의 해체, 신분과 계급의 예속으로부터 해방된 근대적 개인과 근대적 사고의 대두, 자기 의지(능력)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로운 개인의 출현을 기다려야 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서양에서 ‘근대의식의 개막’이라고 일컫는 르네상스 시대에 활동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다.
마키아벨리는 인간의 삶에 작용하는 힘의 실체를 두 가지로 규정한다. 그 하나가 ‘포르투나(Fortuna)’이고 다른 하나가 ‘비르투(Virtù)’이다. ‘포르투나’는 로마신화에서 운명의 수레바퀴를 맡아 사람들의 운명을 관장·결정하는 여신의 이름이다. 라틴어 ‘포르투나’는 우리 말로 ‘운명’ 또는 ‘운’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마키아벨리에게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주체적 의지와 역량으로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밖에서 자신에게 닥쳐와 그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의 성공과 실패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외부의 힘”(정정훈 지음, 『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 그린비, 2011. p106 인용)을 뜻한다.
“저는 본래 세상일이란 운명과 신에 의해서 다스려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를 통제할 수 없다고 생각해 왔고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 이 문제에 관해서 생각할 때 저 자신도 간혹 어느 정도까지는 이 의견에 공감합니다.” (정정훈 지음, 『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 그린비, 2011. p101 인용)
반면 ‘비르투’는 마키아벨리에게 “포르투나(운명)에 일방적으로 좌우되지 않고 그것에 대한 통제력을 높이고 활용함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이루어내는 힘(정정훈 지음, 『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 그린비, 2011. p114 인용)”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박탈하지 않기 위해서 저는 운명이란 우리의 행동에 대해서 반만 주재할 뿐이며 대략 나머지 반은 우리의 통제에 맡겨져 있다는 생각이 진실이라고 판단합니다.” (정정훈 지음, 『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 그린비, 2011. p110 인용)
이러한 이유에서 운명의 힘은 인간이 자신에게 맞서 아무런 의지와 역량을 갖추고 있지 않은 곳에서 그 위력을 떨치며, 이때 운명은 인간의 삶을 전적으로 통제하거나 조종·지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역으로 운명에 대항하기 위해서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 역량을 발휘하는 곳에서는 운명의 힘이 제멋대로 인간의 삶을 좌지우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인간이 그것을 통제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주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마키아벨리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근대의 개막과 더불어 운명에 맞서 의지(능력)의 반격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지만 그럼에도 운명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왜 그럴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알 수 없거나 혹은 알지 못하거나 또는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어떤 힘이 자신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자신의 삶을 통제하거나 지배하는 운명의 실체를 인지한다고 해도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있는 의지와 역량이 자신에게 없거나 혹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대개 운명의 힘 앞에서 나약한 겁쟁이가 되거나 무기력한 약자가 되고 만다.
우리의 삶에 작용하는 운명의 힘과 의지(능력)의 힘 중 어느 한쪽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기는 어렵다. 인간의 삶에는 아무리 의지와 능력을 발휘해도 전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힘이 분명 존재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의지와 역량으로 어느 정도 삶을 통제할 수 있는 힘 역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운명과 의지(능력)의 힘이 인간의 삶에 작동하는 관계를 철학적으로 접근하려면 네 가지 차원에서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첫째는 ‘운명의 본성은 무엇인가?’이다. 둘째는 ‘운명을 구성하고 있는 힘의 실체는 무엇인가?’이다. 셋째는 ‘운명은 어떻게 변화하는가?’이다. 마지막 넷째는 ‘운명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의지(능력)의 힘은 어떻게 작용하는가?’이다. 특별히 이러한 철학적 질문은 인간이 운명의 노예가 아닌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네 가지 차원의 질문에 대해 장자는 시·공간을 초월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우 유의미한 철학적 관점과 인문학적 해법을 제공하고 있다. 장자는 ‘운명’에 대한 전통적이고 지배적인 동양의 사유 방식, 즉 결정론·불변성·확정성·필연성·예측성 등을 전복하고 해체하는 유일무이한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그럼 ‘호자와 무당 계함의 우화’를 통해 장자가 ‘운명의 본성’을 어떻게 들여다보고 있는지부터 시작해보도록 하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