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교·관아·활터’ 옛 읍성 원형 마지막 활터…김제 홍심정

[활터 가는 길]⑯ 선생안 옮겨간 자리에 팻말 걸었더니 정간 신앙

2021-08-23     한정곤 기자

[드론촬영=안한진]

조선 시대 김빙(金憑)이라는 조정 관리가 있었다. 전주 출신으로 1580년(선조 13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이조좌랑을 거쳐 형조좌랑으로 옮겼고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 당시에는 추국관(推鞫官)으로 정여립(鄭汝立) 추형(追刑)에 참여했다. 평소 바람을 쏘이면 눈물이 흘러내리는 눈병을 앓고 있었던 그는 늦가을이었던 추형 당일 쌀쌀한 날씨에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이로 인해 ‘역적의 죽음을 슬퍼했다’는 죄목이 씌워져 곤장을 맞고 죽었다. 하담 김시양의 문견수필집(聞見隨筆集)인 『부계기문((涪溪記聞)』에는 그날의 일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기축년 옥사를 다스릴 적에 정철은 영수가 되고 백유함·이춘영 등은 오른쪽 날개가 되어 당론이 다른 자들은 때려 쳐서 거의 다 없애버렸다. 김빙이라는 자는 전주 사람이니 정철과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틈이 생긴 지가 이미 오래였다. 김빙은 평소 풍현증(風眩證)이 있어 날씨가 춥고 바람이 불면 문득 눈물이 흘렀다. 정적을 육시할 때에 김빙도 백관의 반열 가운데 서 있었는데 때마침 날씨가 차서 어김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는 일찍이 백유함과 틈이 있었던 터라 백유함은 김빙이 슬피 운다고 얽어서 죽였다. 이때부터 조정과 민간이 꺼리고 두려워해 바로 보지 못했다.” 비단 김빙만이 아니었다. 김빙이 눈병으로 역적몰이를 당했다면 전라도도사였던 조대중(趙大中)은 애기(愛妓)와의 이별이 화근이 됐다. 전라도 지방을 순시하던 조대중은 부안에서부터 데려온 관기와 보성에서 헤어지게 돼 아쉬움에 눈물을 보였다. 이때 보성 사람 정교(鄭僑)가 나주에서 유발(柳潑) 등 여러 사람에게 그 일을 알렸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정여립의 죽음을 전해 듣고 방에 들어와 울었다’는 말로 와전됐다. 결국 조대중은 역적으로 몰려 팔·다리가 말에 묶여 사지가 찢겨 나가는 육시형(戮屍刑)을 당했고 그의 처첩과 자녀, 동생과 조카 등도 모두 죽임을 당해야 했다. 임진왜란을 3년 앞두고 발생한 기축옥사는 정여립 역모사건이 계기가 됐다. 500여만명에 불과했던 조선 인구 가운데 희생자만 1000여명에 이른 것으로 역사는 기록한다. 심지어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이끌고 혁혁한 전과를 올렸던 고승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당 유정도 연루돼 모진 국문을 받았지만 겨우 목숨만은 건졌다. 명종(1534~1567년)대의 척신 윤원형의 사위 이조민이 정치적 사건을 정리한 『괘일록(掛一錄)』에는 이같은 피해자들의 면면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는 천하공물론(天地公物論)과 ‘어찌 임금 한 사람이 주인이 될 수 있는가? 누구든 섬기면 임금 아니겠는가’라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앞세워 대동사상(呼和浩特市思维方式)을 펼친 정여립은 자호(自號)로 삼았던 진안군 상전면 수동리의 본거지 죽도(竹島)에 토벌군이 들이닥치자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기축옥사로 정여립은 동래 정씨 족보에서 이름이 지워졌다. 정확한 출생지는 알려지지 않고 무덤도 없다. 그가 살았던 집은 불태워졌고 텃자리까지 파내 깊은 웅덩이로 만들어졌다. 지금은 철도가 놓이면서 웅덩이까지 메워져 생전 정여립이 살았던 집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의 대동사상은 훗날 ‘백성은 물이나 불·호랑이보다 더 두려운 존재’라는 허균의 호민론(豪民論)과 하·은·주나라 시대 탕왕과 무왕의 왕조 교체 정당성을 주장한 정약용의 탕무혁명론(湯武革命史論)으로 이어졌고 다시 전봉준의 동학농민혁명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기축옥사를 불러온 정여립 역모사건은 그 실체가 불분명해 아직까지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정여립이 실제 역심(逆心)을 품고 있었느냐가 논쟁의 쟁점이다. 다만 송익필이 배후조종하고 송강 정철이 전면에서 칼을 휘두른, 서인(西人)의 동인(東人)에 대한 대학살극이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 하루 천 리를 달렸다는 정여립의 용마 무덤
호남고속도에서 금산사IC로 빠져나와 금산사 방향으로 3km쯤 갔을까. 용암교를 건너 들어선 조그만 마을 앞으로 새파란 잔디가 깔린 축구장을 잇대어 놓은 듯한 논이 드넓게 펼쳐진다. 이슬처럼 낟알을 머금은 벼가 질서정연한 군무인 듯 바람에 출렁인다. 논둑길을 따라 그늘을 드리운 두 그루의 노거수 아래 봉긋 솟은 봉분이 눈에 들어온다. 비석이나 상석 등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규모는 그리 작지 않다. 정여립이 타고 다녔다는 용마의 무덤이다.

정여립은 용암마을로 불리는 이 마을에서 처음 대동계를 조직했다. 그는 북동쪽으로 1.5km 떨어진 제비산에 살고 있었으며 용암마을 뒷산에는 조상의 무덤과 사당이 있었다. 남쪽 상두산에서는 부하들과 말을 타고 활을 쏘며 무술을 연마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제비산에서 천일기도를 마친 후 용암마을 남쪽으로 150m 떨어진 용바위 아래에서 용마(龍馬)를 얻었다고 해 마을 이름도 용암(龍岩)이라 붙여졌다. 그의 용마는 하루에 천 리를 달렸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정여립은 자주 용마를 타고 활을 쏘아 용마와 화살 중 누가 빠른지 시합을 했다. 그날도 정여립은 화살을 쏜 후 용마를 타고 달리는데 용마가 화살을 따라가지 못하는 듯 하자 홧김에 말에서 내려 목을 베어버렸다. 그 순간 화살이 용마의 궁둥이에 꽂혔다. 경솔함과 어리석음을 탓한 정여립은 슬퍼하며 용마를 선산 앞에 묻었다.
고흥분청문화박물관
말이 화살보다 빠르다는, 조금은 황당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비슷한 전설은 경북 영천과 전남 고흥에서도 전해온다. 국토교통부 국토정보지리원에 따르면 영천시 고경면 도암리에는 ‘말무덤’이라는 지명이 있다. 고려 말 황보 장군이 자기 말을 데리고 화살과 누가 빠른지 내기를 하다가 말이 화살보다 늦었다 하여 목을 베고 나니 그제야 화살이 떨어져 후회하고 그 말을 이곳에 묻었다 해 붙은 지명이다. 고흥군 점암면 팔영산 제1봉 유영봉(儒影峰)에도 송팔응(宋八應) 장군과 백마의 전설이 전해온다. 어려서부터 팔영산에서 무예를 연마한 송팔응은 자신의 애마인 백마의 출중한 능력을 시험해 보기 위해 화살 속도와 백마의 속도를 시합해 보기로 했다. 그는 팔영산 유영봉을 겨냥해 화살 한 발을 쏜 뒤 곧바로 백마를 타고 뒤쫓았다. 그러나 유영봉에 도착했을 때 화살이 보이지 않자 말이 늦게 도착했다고 판단하며 실망한 나머지 백마의 목을 단칼에 베고 말았다. 그때 뒤늦게 화살이 날아와 봉우리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갔다. 송팔응은 자신의 경솔함을 크게 뉘우치며 통탄했지만 이미 백마는 죽은 후였다. 송팔응은 이후 자신의 경솔함을 탓하며 무예를 더 연마했고 전쟁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당시 송팔응이 쏜 화살이 팔영산 유영봉을 뚫고 지나간 자리는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정여립의 용마 이야기는 이들 설화와 달리 허투루 흘려버리지 못한다. 용암마을 주민들에게는 신앙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정여립의 조상 사당이 있었던 자리에 지어졌다는 대한불교 태고종 쌍용사에서는 매년 정월 보름 용마의 원혼을 달래주는 용마제(龍馬祭)를 지내고 있다. 쌍용사 보살 한 분은 “제사를 지내지 않은 해가 있었는데 흉년이 들었다”면서 “이후에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제사를 모시고 있다”고 말했다. 원래 논 가운데에 있었던 용마 무덤은 지난 2016년 현재의 자리로 이장됐다. 쌍용사 소유였던 논을 동래 정씨 문중에서 사들였고, 그 중 용마의 무덤이 있던 7.7㎡의 땅을 김제시에 기부채납하면서 조건으로 이장을 원했다고 김제시 관계자는 전한다. 일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장 당시 무덤에서 말뼈가 나왔다는 말도 떠돈다. 그러나 김제시 관계자는 “발굴조사를 다 했지만 아무 것도 없어 흙만 떠서 옮겼다”며 “설화에 기초한 무덤 아니냐”고 일축했다. 설화는 설화 그 자체로 아름답게 남아야 하지 않을까. 더구나 애절한 사연을 간직한 설화를 굳이 경제적 이익을 앞세워 파헤치고 옮기면서 과학적으로 따져야 했는지 할 말을 잃는다. 실제 용마가 묻혀 있었다 하더라도 400년을 훌쩍 뛰어넘는 세월 동안 그 뼈가 온전할 리도 없다.

◇ 향교, 관아 그리고 활터…옛 읍성 지도의 원형
김제의 옛 이름은 금구였다. 1895년(고종 32년)까지만 해도 전주부 금구군이었고 1896년에야 전라북도 금구군이 됐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김제군에 병합돼 금구면으로 바뀌었으며 1995년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합돼 김제시로 불리고 있다.

정여립이 살았다는 금산사 입구의 원평은 조선 후기 번영한 시장으로 1894년 전봉준(全琫準)이 머물며 각지의 집강소(執綱所)를 지휘하던 동학농민운동의 거점이었다. 역사문제연구소를 설립한 역사학자 고(故) 이이화 선생은 “기축옥사의 여파로 금구가 전주에 복속되고 전라도를 반역의 고을로 몰아 호남 인사의 등용을 억제하는 등 역사적 폐단이 끝내 이곳을 동학농민혁명의 진원지로 만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 전라도 사람들의 반골(反骨) 기질과 ‘역모의 땅’이라는 주홍글씨의 진원지가 알고 보면 김제였음이다. 지평선이 보일 만큼 끝이 보이질 않는 만경평야를 가득 채우고 살랑살랑 바람에 흔들리는, 아직 여물지 않은 낟알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논을 가로질러 달리는데 안한진 접장이 “내가 농민이었어도 죽창을 들었을 것 같다”고 말한다. 이 넓은 땅에서 거둬들인 쌀로 내 식구를 먹이지 못하고 모두 빼앗긴다면 반란의 대열에 서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금산면의 산들은 서쪽의 김제시로 향할수록 하나씩 둘씩 깎여 더욱 광활한 대지로 바뀌어 간다. 급기야 산들이 모두 사라지고 평야 군데군데 소나무가 빽빽한 구릉만 바다 위의 섬처럼 떠 있다. 그나마 가장 높은 산 아닌 산이랄까. 김제 도심으로 들어서자 해발 48m에 달하는(?) 성산(城山)이 이방인을 반긴다. 돌고 돌아 홍심정(紅心亭)을 품고 있는 산을 만난다.
사진6.
피지산(避支山)이라 불렸던 성산은 김제의 주성(城池)으로 누가 언제 어떻게 쌓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지만 교동 성산성지(城花园址)에는 남·서·북쪽에 토성으로 쌓은 흔적이 남아 있다. 서해 연안에 가장 근접한 성으로 해적의 침입을 방어하고 충청·전라 내륙으로 통하는 요충지이기도 했다. 백제 패망 후에는 일본에 있던 왕자 부여풍이 귀국해 백제부흥운동을 벌였고 이때 임시수도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적 제482호인 김제 관아와 향교, 용암서원과 벽성서원 등 전통적 유교 자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김제의 중심지다. 홍심정은 성산 서쪽 절개지에 자리하고 있다. 1789년(정조 13년) 성산 북쪽 언덕에 조지택 초대 사두가 천홍정(穿紅亭)이란 정자를 세우고 활터를 조성한 이후 1820년(순조 20년) 장소가 협소해 서변면 옥거리(현 옥산동)로 이전했고 1826년(순조 26년)에는 서변면 사정거리(현 요촌동)로 다시 옮겼다. 일제강점기였던 1920년에는 중건과 함께 현판도 홍심정으로 바꾸어 달았고 1978년 활터와 정자를 신축하며 원래 활터가 있었던 성산으로 되돌아왔다. 홍심정 사원으로 서울대 스포츠과학연구소 연구원인 박근 군산대 교수는 “과거 읍성 지도를 보면 향교, 관아, 활터가 나란히 배치돼 있다”면서 “김제는 성산을 중심으로 학문의 중심지였던 향교와 무술 연마의 중심지였던 활터, 행정의 중심지였던 관아가 한데 어우러진,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읍성의 원형이 온전히 보존된 곳”이라고 말한다. 지금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홍심정은 한때 김제시에 의해 외곽으로 쫓겨날 뻔하기도 했던 위기의 시기가 10여년이나 이어진 적도 있었다. 2006년 취임한 이건식 김제시장이 홍심정 오른쪽에 문화예술회관을 신축하며 성산공원 활성화를 위해 홍심정 이전을 추진한 것이다. 처음엔 많은 사원들이 3억원의 이전보상비를 제시한 김제시 정책에 맞장구를 치면서 검산체육공원에는 현대식 활터가 미리 착공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2016년 홍심정은 사원총회를 통해 이전을 부결시켰고 한 달 뒤 김제시가 매입 의사를 철회하면서 없던 일이 됐다. 2017년 검산체육공원에 준공된 활터는 현재 금만정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전을 주장했던 홍심정 사원 일부가 개정 초기 참여하기도 했지만 또 일부는 다시 홍심정으로 되돌아왔다.

◇ 선생안·사안으로 230여 년 역사 온전
김제시청 뒤편 성산길 옆에 자리한 홍심정은 무겁이 사대보다 2.7m가 높아 앙사(仰射)가 특징이다. 사대에서 보면 왼쪽으로 군데군데 성산 기슭을 깎아내린 암벽이 속살처럼 드러난다. 일제강점기 수탈을 목적으로 김제와 군산을 잇는 도로가 건설됐는데 이때 채석을 했던 생채기들이다. 홍심정이 들어서기 전까지 채석장이 방치되면서 이곳에는 2개의 거대한 웅덩이가 생겼다고 한다. 당시를 기억하는 홍심정 노접장은 “연애에 실패한 처녀들이 성산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는 웅덩이로 유명했다”면서 “귀신 나온다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없던 외진 곳이었다”고 전한다. 웅덩이는 활터가 조성되면서 메워졌고 현재 그 자리엔 국기봉이 도열해 있다.

사정(射亭)은 목조 한옥 양식과 콘크리트조 양식이 하나로 합쳐진 복합건축물이다. 현대식 콘크리트 건축물이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한옥 건축물을 이고 있다. 1층 콘크리트 건물 내부에는 230여 년 동안 사두를 역임한 102명의 성명·사진과 각종 서예 액자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사두실과 주방이 옆으로 배치됐다. 2층 한옥 건물에는 홍심정의 역사를 증언하는 각종 편액들을 보관하고 있다. 현판은 두 개가 전해오는데 1층 사대 뒷편의 현판은 청암(淸巖) 이상록(李相錄·1929~1998년)이 썼다. 김제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서예와 유학에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과 왕래하면서 잘못된 점을 꾸짖어 바로잡는다는 질정(叱正)을 받으며 공부를 했다고 한다. 특히 안진경체를 좋아해 전라북도 미술대전에서 특선을 했고 초대작가와 심사위원도 했다. 평생 김제에 살며 김제문화원장(1981~1987년)과 김제향교 전교를 지내는 등 김제 문화의 계승과 창달에 열정을 가졌다. 현판에는 ‘西紀 一九八3年 癸亥 全羅北道弓道協會 郭在松 會長 雅囑 淸庵 李相錄(서기 1983년 계해 전라북도궁도협회 곽재송 회장 아촉 청암 이상록)’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어 당시 전북궁도협회 제8대 회장이었던 곽재송 회장의 부탁을 받아 적은 것으로 확인된다.
2층 한옥 건물 내부에는 이보다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현판이 하나 더 있다. 흰 바탕에 검은색 글씨로 낙관과 함께 ‘金石山 鴻墨(김석산 홍묵)’이라 쓰여있다. 그는 석산(石山) 김필형(金弼瀅)으로 확인되지만 행장은 물론 언제 어떤 인연으로 홍심정 현판을 썼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