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안 황학정 원위치 최초 공개…방공호 북쪽 80여m 민가 자리로 확인
조선총독부 「흥화문내총독부관사배치도」 도면에 ‘黃鶴亭’ 표기
2022-12-19 한정곤 기자
근대 활쏘기의 종가(宗家) 황학정(黃鶴亭)이 최초 건립된 경희궁 내 위치가 확인됐다. 황학정의 원래 위치가 언론을 통해 일반에 공개된 것은 이번이 최초다.
황학정은 일제강점기였던 1922년 조선총독부가 경희궁 안에 전매국 관사를 건립하면서 폐정(廢亭) 위기를 맞았지만 인왕산 옛 등과정(登科亭) 터로 옮겨 오늘날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
황학정 사원은 물론 활쏘기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까지도 등과정으로 옮겨오기 이전의 경희궁 안 황학정의 원래 위치에 대해서는 ‘회상전 북쪽’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었을 뿐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였다.
헤드라인뉴스는 경희궁 궁궐지에 조선총독부 관사 건립을 위해 작성된 도면 「조선총독부 관사배치도」에서 ‘黃鶴亭’이라는 한자를 확인했다. 도면의 제목은 「興化門內總督府官舍选配圖(흥화문내총독부관사배치도)」다. 황학정이 표기된 것으로 미루어 등과정 터 이정(離亭) 이전인 1921~1922년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도면은 경희궁 동쪽 끝부분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현재 서울역사박물관과 내수공원 사이에 전매국 관사지 43호가 북쪽으로 길게 배치돼 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원래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던 흥화문이 서쪽으로 약간 옮겨져 동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안쪽에는 경성중학교 운동장이 있고 북쪽에는 부속소학교가 있다.
황학정은 배치도 왼쪽 마지막 관사 바로 아래에 있다. 동쪽으로 약간 기운 북향 건물이다.
경희궁이 훼철되기 이전까지 이곳에는 사정(射亭) 봉황정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희궁 회상전 동쪽 내원(內苑)의 별실로 융무당이 있었다”며 “남쪽의 대를 관사대(觀射臺)라 하고 북쪽의 정자를 봉황정(鳳凰亭)이라 하는데 모두 활쏘기를 익히고 무예를 연습하는 곳”이라고 소개한다.
1898년 고종의 윤음(綸音)으로 황학정을 건립할 때 이미 사라진 봉황정 자리 부근에 다시 활터를 세운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정자 하나 짓는다고 활터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과녁까지의 공간도 확보돼야 했기 때문에 기존의 활터 자리를 선정한 것으로 판단된다.
북향으로 건립된 경희궁 내 황학정의 현재 위치는 서울역사박물관이 펴낸 『궁터에서 시민공간으로–신문로2가』의 「경희궁터 복원 추정도」를 통해 서울시 종로구 경희궁1길 33(종로구 신문로2가 1-42)의 민가로 확인된다. 회상전이 있었던 현재의 방공호에서 북쪽으로 불과 80여 미터에 불과한 거리다.
당시 과녁까지의 거리가 유엽전 거리인 150미터로 현재 활터의 145미터와 유사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무겁의 위치는 성곡미술관으로 추정된다. 황학정 정자 방향과도 일치한다. 성곡미술관은 광명전을 비롯해 상휘당, 영취정, 춘화정 등이 있었던 곳이다. 전매국 관사가 황학정 사대와 과녁 중간에 들어섬으로써 황학정은 더 이상 활터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돼 철거가 결정되고 등과정 터로 이정한 것으로 해석된다.
1921년 4월 신설된 전매국은 국가에서 지정한 물품을 독점적으로 판매하는 관청으로 인삼·소금·담배·아편 등 4가지 상품을 생산·전매했다. 청사는 1924년까지 정동 법무국 옆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1921년 이전부터 추진된 경희궁 내 관사지 개발은 경희궁 터를 활용해 부족한 총독부 관사지와 신설 전매국 직원들의 주택공급이 목적이었다. 이미 많은 전각들이 훼철돼 공터가 많았고 경성중학교가 이전해 궁궐의 상징성도 약화됐기 때문이었다.
도면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도면 작성 당시만 해도 황학정은 관사부지에 편입되지 않았다.
『매일신보』는 1922년 6월23일자 ‘서대문 관사 낙성’이라는 기사에서 35호가 낙성돼 총독부와 전매국 관리들이 입주했다고 전한다. 황학정이 옮겨가기 이전에 이미 관사조성 공사가 진행돼 이정 직후 입주한 것이다.
고종의 부마 박영효가 회장이었던 친일단체 조선교풍회에 황학정 건축물을 양여한 조선총독부 허가서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1922년 5월12일자 양여 허가문서에는 “1922년 6월15일까지 건물을 해체 철거하고 그 자리를 정리하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황학정 이정 최종시한인 8일 뒤에야 관사 입주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황학정이 등과정 터로 옮겨간 이후인 1922년 하반기부터 1923년에 걸쳐 10개 남짓의 관사부지가 추가로 마련되고 1923년 이후에는 서북측 구릉에도 2개의 관사부지가 추가된다. 추가된 2개의 관사부지 중 한 곳이 바로 황학정 자리다.
특이한 점이라면 1920년대 초 건립된 관사들은 모두 단층집이지만 이들 2개의 관사는 2층이다. 조선총독부 ‘본부건축표준’ 제7장 제105조에는 관사는 목조단층 건물로 짓는 것이 원칙이지만 부지 등이 협소할 경우 특별히 2층 건물을 지을 수 있다고 적고 있다. 이 두 필지에 지어진 관사는 이 규정을 적용한 것이다. 필지 규모를 감안하면 주임을호 혹은 판임갑호급 관사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제강점기 관리등급은 크게 고등관과 하급직원으로 구분된다. 고등관은 왕이 직접 임명하는 친임관, 칙임관(1·2등관), 주임관(3~9등관)과 각 소속장관이 임명하는 판임관(4등급으로 구분)으로 세분된다. 하급 직원에는 고원과 용인이 있으며 고등관의 주택은 관사, 하급직원의 주택은 숙사라 부른다. ‘본부건축표준’에서 고등관 관사의 건축은 칙임관 관사 2종(갑호·을호), 주임관 관사 2종(갑호·을호), 판임관 관사 3종(갑호·을호·병호) 등 모두 7종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번 도면을 통해 그동안 각종 지도와 사진에서 진위여부가 불확실했던 황학정도 명쾌하게 밝혀진다.
먼저 일제강점기 경희궁 전각의 훼철 사항을 정리한 『경성부사(北京府史)』에 게재된 사진 속 정자가 황학정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경희궁 내전인 회상전 옆에서 촬영한 경성중학교 부설소학교 학생들 뒤쪽으로 벽파담이라는 연못이 있고 담장 뒤쪽 구릉 마루에 정자가 보이는데 황학정이다.
국궁계 일부에서는 사진 속 정자가 현재의 황학정과 같은 정자 건축물이 아니라 누대(樓臺) 건축물로 보여 유사점이 없다며 그동안 봉황정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그러나 경희궁의 전각 상당수는 화재로 소실됐고 1865년 8월 흥선대원군이 추진했던 경복궁 영건(營建) 과정에서 모두 해체돼 경복궁으로 옮겨 재사용됐다. 심지어 박석(薄石)과 계체석(階砌石)까지 옮겨갔다.
『경성부사』에 따르면 1910년 경술국치 당시 경희궁에는 숭정전, 회상전, 홍정당, 흥화문, 황학정만 남아있었다. 특히 남아있는 5개의 전각 중에서 회상전 북쪽에는 황학정만 있었기 때문에 비록 윤곽은 뚜렷하지 않지만 황학정 뒤편 모습이 확실하다.
또한 「조선지형도」에 실린 ‘경성서북부’(1921년)에도 황학정이라는 글자는 없지만 도면과 같은 위치에 황학정 건축물 표기가 확인된다. 1913년 신축된 경성중학교 건물 외에 숭정전·회상전 일대의 전각과 부속건물·황학정·흥화문 등이다.
경희궁 내 황학정의 원래 위치가 표기된 이번 도면은 새로 발굴된 도면이 아니라 서울역사박물관을 비롯해 여러 경희궁 연구자와 연구기관들에 의해 이미 여러 차례 공개된 바 있다. 다만 국궁계에서 ‘황학정’이라는 표기를 확인하지 못했을 뿐이다. 도면 원본이 아닌 각종 발굴·연구보고서나 논문 등에 게재된 도면으로는 한자 크기가 워낙 작아 판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국궁계에서는 황학정이 표기된 경희궁 내 도면이 확인돼 국궁계에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특히 올해는 황학정의 등과정 이정 100주년이 되는 해로 황학정과 근대 활쏘기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한편 황학정 일부 사원들은 활쏘기 연구자·연구단체들과 함께 황학정의 등과정 터 이정 100주년을 맞아 이번에 확인된 경희궁 내 황학정 원래 위치를 비롯해 역대 황학정 사두와 좌목(座目)에 이름을 올린 인사들의 행적, 『황학정 백년사』를 통해 잘못 알려진 황학정 역사 등을 재조명하는 심포지엄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