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하는 것은 다만 글자를 다루는 작은 재주뿐”

[弓詩] 조선 선비, 활쏘기를 노래하다…①철총마 타고

2024-02-08     한정곤 기자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활쏘기는 곧 인문학이었다. 사냥 도구나 전쟁 무기라는 활의 본래 기능과 심신단련이라는 목적지향적 접근보다 인간의 내면과 문화를 엿보려 했다. 그리고 이를 언어화하면서 인간의 가치와 사상을 예술작품으로 선보이기도 했다. 필자는 조선 선비들이 언어화한 활쏘기를 ‘궁시(弓詩)’라고 부른다. 근래 들어 활쏘기는 과녁 맞추기[시수(矢數)]에 연연해 하는 스포츠로 변모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활쏘기가 여느 스포츠와 구별되는 가장 차별화되는 지점이 바로 조선 선비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인문학적 접근, 즉 궁시(弓詩)다. 활쏘기 외에 어떤 스포츠에서 시(詩)와 같이 언어로 표현된 예술작품을 찾을 수 있겠는가. 『헤드라인뉴스』는 조선 선비들이 직간접적으로 활쏘기를 노래한 궁시(弓詩)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고구려

철총마(鐵聰馬) 타고 보라매 받고
백우장전(白羽長箭) 천근각궁(千斤角弓) 허리에 차고
산 너머 구름 밖에 꿩 사냥하는 저 한가한 사람
우리도 성은(聖恩)을 갚은 후에 너를 좇아 놀리라.

조선 영조 때의 시조시인 김묵수(金黙壽·연대미상)의 작품이다. 철총마는 푸른 털에 흰 털이 조금 섞인 말을 뜻하며 보라매는 생후 1년이 안 된 새끼를 잡아 길들여 사냥에 쓰는 매다. 백우장전은 흰 새의 깃을 단 긴 화살이고 천근각궁은 천근이나 되는 각궁을 말한다. 국악 정가(正歌)의 남창가곡 계면조 계략으로도 자주 불리고 있는 이 시조는 사냥을 떠나는 장쾌한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1300파운드가 넘은 천근각궁이라는 과장이 심한 표현이 있기는 하지만 호걸스런 남자의 기상이 넘친다. 갈기와 꼬리가 파르스름한 흰 말을 타고 태어난 지 1년이 안 된 새끼를 잡아 길들인 보라매를 팔에 받고 긴 화살 큰 활을 허리에 찬 사냥꾼의 모습이 묘사됐다. 또한 산야를 달리며 사냥하는 사람을 부러워하면서 자신도 임금의 은혜를 갚은 후에 그와 같이 놀겠다고 했다. 김묵수는 김수장(金壽長)·김천택(金天澤)의 후배로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에서 활동한 것으로 전해진다. 경정산가단은 조선 숙종∼영조 무렵 김수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가객(歌客)들의 모임이다. 김수장은 김묵수에 대해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이 높고 뜻이 고매했으며 노래를 잘하고 글씨도 잘 썼다. 장단가 6장을 지었는데 가락이 아주 호탕하고 상쾌하다”고 했다. 김묵수의 시조는 <철총마 타고> 외에도 7수가 더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시조와 비슷한 내용이 150여년 앞선 중종 때의 문신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1514~1547년)의 『금호유고 부록 잡기 제가잡기(錦湖遺稿 附錄 雜記 諸家雜記)』에 등장한다.

산에 눈이 하얗게 쌓였을 때 검은 초피 갖옷을 입고 허리에는 흰 깃이 달린 긴 화살을 차고 팔뚝에는 백 근짜리 센 활을 걸고 철총마를 타고서 채찍을 휘두르며 골짜기로 들어가면 긴 바람이 골짜기에서 일어나 초목이 진동한다. 갑자기 큰 멧돼지가 놀라서 길을 헤매고 달릴 때 곧 화살을 꺼내 활을 힘껏 당겨 쏘아 죽이고, 말에서 내려 칼을 빼내어 이놈을 잡아서 고목을 베어 불을 놓고 기다란 꼬챙이에다가 그 고기를 꿰어서 구우면 기름과 피가 끓으면서 뚝뚝 떨어진다. 걸상에 앉아 고기를 저며 먹으면서 큰 은대접에 술을 가득히 부어 마시고 얼큰히 취할 때에 고개 들어 올려다보면 골짜기의 구름이 눈이 되어 취한 얼굴 위로 조각조각 솜처럼 나부낀다. 이런 맛을 자네가 아는가. 자네가 잘하는 것은 다만 글자를 다루는 작은 재주뿐이네.
大雪滿山 被黑貂裘 腰帶白羽長箭 臂掛百斤角弓 乘鐵驄馬 揮鞭馳入澗壑 則長風生谷 萬木震動 忽有大豕驚起 迷路而走 輒拔矢引滿射殪 下馬拔劍屠之 仍斫老櫟焚之 長串貫其肉煮之 膏血點滴 踞胡床 切而啗之 以大銀椀滿酌快飮 飮至醺然 仰看壑雲成雪 片片如綿 飄泊醉面 此中之味 君豈知之 君之所能者 只是翰墨小技耳

이 글은 임형수가 호당(湖堂)에 있을 당시 퇴계(退溪) 이황(李滉)에게 사나이의 호쾌한 취미를 말하며 사냥을 예찬한 것으로 전해진다. 즉 활쏘기보다 투호를 더 즐겼던 퇴계를 향해 “자네가 잘하는 것은 다만 글자를 다루는 작은 재주뿐”이라며 활을 들고 사냥하는 맛을 아느냐고 일침을 놓은 것이다. 이에 대해 이황은 “내가 이 말을 듣고는 상쾌해 그 기상의 호탕함을 지금도 상상한다”(余聞之爽然하야 其氣像之豪逸이 以来想象作文이로다)고 『퇴계집』에 적었다. 이렇게 볼 때 임형수의 『금호유고 부록 잡기 제가잡기』를 읽은 김묵수가 훗날 시조로 읊은 것 아닌가 추정할 수 있지만 정확한 연관 관계는 확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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