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살 석 대로 천하 안정시키려 했네”
[弓詩] 조선 선비, 활쏘기를 노래하다…⑪射帿
2024-07-17 한정곤 기자
學射初心豈等閒 활쏘기 배울 때 마음가짐 어찌 소홀했으랴
欲將三箭定天山 화살 석 대로 천하 안정시키려 했네
何當一入龍庭去 어찌하면 한 번 용정에 들어가
掃蕩腥塵奏凱還 오랑캐 쓸어내고 개선가 부르며 돌아올까. (『제월당집』 제1권)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 지식인의 패배의식과 울분 등 혼란스러운 감정이 읽혀지는 송규렴(宋奎濂·1630년(인조 8)~1709년(숙종 35)) 시다.
청을 배척하고 명나라의 복수를 외치는 조정과 유림의 척화론이 담겨있지만 현실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나약한 지식인의 비애가 담겨있을 뿐이다.
저자는 활쏘기를 처음 배울 때 당나라 설인귀가 화살 세 발로 10만명이나 되는 돌궐 군사들의 사기를 꺾어 항복을 받아냈다는 고사를 떠올리며 청(淸)나라를 쓸어버리고 싶다는 전의(戰意)를 다졌다. 용정(龍庭)은 흉노의 선우(單于)가 5월 큰 회합을 갖고 천지 귀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곳으로 여기서는 청나라의 조정을 가리킨다.
그러나 무관도 아닌 문관인 송규렴이 오랑캐를 직접 쓸어버린다는 것은 사실상 가능하지도 않은, 관념적인 말장난에 불과할 뿐이다.
사실 송규렴은 송시열과 정치적 행보를 함께 했다. 송시열은 효종이 즉위하자 기축봉사를 올려 북벌론에 불을 지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민생안정, 정유봉사, 수신형가(休身刑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底下) 등 화려한 말장난 속에서도 청을 치는 구체적인 방안은 제시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북벌을 앞세운 정치는 있었지만 북벌은 없었던 것이다.
누군가는 대장부의 기개가 담긴 강건한 기상을 엿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약한 지식인이 술 한 잔 하며 넋두리하는 시로 읽혀진다.
송규렴은 19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1654년(효종 5)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검열·지평·정언·사예(司藝)·응교·서천군수 등을 역임했다. 현종 때 수찬·부교리·정언·헌납·이조좌랑·사간 등을 거쳐 1667년(현종 8)에 사헌부집의에 이르러 병으로 사직했다가 다시 홍문관교리를 거쳐 사간이 됐다.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 장씨(張氏)의 복상문제에 대해 남인의 주장인 기년설(朞年說)이 채택되고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했던 송시열·송준길 등이 귀양가게 되자 이들의 신원을 주장했다가 파면당했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집권하게 되자 다시 기용됐다. 이후 사간·수찬·대사간·승지·이조참의·부제학·대사성 등을 거쳐 대사간이 되어 시폐(時弊) 4조를 올렸다. 그 뒤 안변부사·강양도관찰사·공홍도관찰사·도승지 등을 역임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사직하고 고향에서 학문을 닦았다. 1694년 갑술옥사로 정국이 다시 바뀌게 되자 다시 부제학·대사간·대사헌·우참찬·동지중추부사·예조참판을 지내고 1699년 기로소에 들어갔다. 지중추부사·우참찬·예조판서·대사헌 등에 임명됐지만 모두 사퇴했다. 80세 때에는 지돈녕부사에 올랐으나 사퇴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학문이 뛰어나 송시열·송준길 등과 동종(同宗)·동향(同鄕)으로 함께 삼송(三宋)으로 일컬어졌고 전서(篆書)·주서(籒書)에 능하였다. 회덕의 미호서원(美湖書院)에 제향됐다. 시호는 문희(文僖)다. 저서로는 『제월당집(霽月堂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