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결정돼 있는 것’이 아니라 ‘구성돼 가는 것’이다

[장자 인문학] 제1장 운명에 대하여④

2024-12-10     한정주 고전연구가
장자

[한정주=고전연구가] 장자 철학이 ‘현실 도피 철학’으로 오독(誤讀)되면서 그것이 지니고 있던 실제 색깔, 즉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 현실의 삶에 대한 풍자, 사회 비판 정신은 그 자취가 거의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불행 중 다행하게도 명맥이 끊겨버린 장자 철학의 실제 색깔을 문학 방면에서 재현한 사람이 20세기 초에 등장했는데 그 사람은 바로 루쉰이다.

장자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암흑의 시대에 절망의 시선으로 인간의 심연과 사회의 민낯을 해부했던 것처럼 루쉰 역시 절망의 심정으로 근대 중국인과 중국 사회를 해부한 사람이다.

일본의 문학평론가이자 루쉰 연구의 세계적 전문가인 다케우치 요시미는 루쉰 작품의 특징은 ‘암흑과 절망’이라고 분석한 적이 있다. 루쉰만큼 절망의 눈으로 근대 중국 사회와 중국인을 깊게 들여다본 사람은 없다는 얘기이다. 근대 중국인과 중국 사회는 ‘암흑과 절망’이 전부이며 “희망은 절대 없다”고 확신했던 루쉰은 흥미롭게도 젊은 시절 희망을 둘러싼 친구와의 논쟁 끝에 ‘희망의 존재 여부’ 다시 말해 희망은 절대 없다는 자신의 확신을 증명해보기 위해 의학도에서 작가로 변신한 사람이다.

이러한 까닭에 루쉰의 모든 작품은 직·간접적으로 ‘희망과 절망’에 연결돼 있다고 해도 될 만큼 작가 루쉰에게 이 주제는 평생에 걸친 삶의 화두였다. 이 삶의 화두, ‘절망과 희망’에 대해 루쉰이 얻은 나름의 결론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절망이 허망한 것은 희망이 그러한 것과 같다”는 태도이다. 허망하다는 것은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절망이 실체가 없는 것처럼 희망 역시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실체가 없고 허망한 것이기 때문에 희망에 의지할 필요도 없고 절망에 좌절할 필요도 없다는 얘기이다. 여기에는 애써 희망을 품으려고 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도 없이 자신의 길을 가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두 번째는 ‘희망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태도는 첫 번째 태도보다 희망에 대해 훨씬 더 긍정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희망은 절대 없다는 애초의 확신이, 결국 희망 역시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는 방향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땅 위의 길과 같다. 땅 위에는 본래 길이 없지만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곳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루쉰, 『고향』, (루쉰 지음, 신여준 옮김·해설, 『아Q정전–루쉰 소설 선집』. 「고향」, 글누림, 2011. p112 인용)

삶의 희망은 – 절망 역시 마찬가지로 – 애초 결정돼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마치 사람들이 다니면서 만들어지는 길처럼 희망 역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질’ 뿐이다.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희망이란 ‘있을 수도 있고(실현될 수도 있고)’ 또 ‘없을 수도 있는(좌절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장자가 바라본 운명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희망이 애초 – 있다거나 혹은 없다거나 – 결정되어 있지 않는 것처럼 이미 ‘결정돼 있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운명’만이 존재할 뿐이다. 장자는 여기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이다.

“길은 사람이 걸어 다님으로써 만들어진다. 사물의 명칭은 사람이 그렇게 부르기에 그렇게 정해진 것이다.…모든 사물은 가능성의 상태로 존재한다. 어떤 사물이든 그렇지 않는 것이 없으며 어떤 사물이든 가능하지 않은 것이 없다.” (『장자』 「내편」 ‘제물론’)

운명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 운명은 희극일 수도 있고 반대로 비극일 수도 있다. 또한 성공할 수도 있고 반대로 실패할 수도 있다. 행복할 수도 있고 반대로 불행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느 쪽이라고 해도 이미 ‘결정돼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운명이란 ‘변화의 세계이고 ‘가능성의 세계’이다. 그래서 삶의 희극은 한순간 비극이 되기도 하고 비극은 다시 희극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성공은 실패가 되기도 하고 실패는 성공이 되기도 한다. 행복은 언제든지 불행으로 바뀔 수 있고 불행은 다시 행복으로 바뀌기도 한다.

만약 운명이 이미 결정돼 있다면 그것은 ‘과거의 시간’에 속하게 된다. 하지만 운명이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지금 여기’ 또는 ‘미래의 시간’에 속하게 된다. 지금 여기의 삶이 어떤 길을 어떻게 걸어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운명은 변화하고 다시 구성되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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