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있는 이완구 국무총리 후보자가 자녀들과 관련된 각종 의혹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특히 차남의 병역 기피 의혹과 증여받은 땅과 관련된 투기 의혹은 이 총리 후보자의 발목을 잡고 있다.정의화 국회의장실 4급 보좌관이었던 강모씨는 청와대와 대통령 자택 등을 폭파하겠다고 협박한 아들로 인해 최근 사표를 제출했다.그동안 고위 공직자 후보들은 인사청문회를 전후로 자녀 문제로 낙마를 거듭해 왔다.비단 고위 공직자뿐만이 아니다. 지난 연말에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장녀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의 ‘땅콩 회항’ 사건으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조상의 범죄로 후손이 책임과 처벌을 받아야 했던 연좌제가 거꾸로 자녀로 인해 아버지를 고개 숙이게 하는 신(新)연좌제라는 새로운 풍속을 낳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잘못 가르친 자녀로 인해 몰락의 길을 걸었던 사례들은 역사를 통해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때문에 엄격한 가정교육은 조선시대 가문의 최고 덕목이기도 했다.자녀교육의 교본이라 할 수 있는 경주 최 부잣집을 통해 자녀로 흥하고 망한 인재경영을 조명해 본다. <편집자 : 주>
[한정주=역사평론가] 조선 숙종 시대의 역관(譯官) 부자 변승업은 한때 위중한 병에 걸리자 장부를 가져다가 자신이 사람들에게 빌려 준 돈을 계산해 통계를 내보았다.
그랬더니 적립되어 있는 자금이 은(銀) 50만 냥이나 되었다. 당시 변승업의 아들이 다시 흩어지면 거두기 귀찮고, 시간을 오래 끌면 없어지게 되니 돈을 빌려주는 일을 그만 정리하자고 말했다.그러자 변승업은 크게 화를 내면서 “이 돈은 한양 백성 1만 가구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는데 하루아침에 그토록 쉽게 끊어버릴 수 있겠느냐”며 자식을 심하게 꾸짖었다.그는 말년에 “나라의 권력을 좌지우지한 권세가 가운데 사사로운 이익을 꾀한 사람 치고 3대를 유지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가르침을 자손들에게 남겨 스스로 경계로 삼으라고 했다.이 말은 비록 자신이 당대 최고의 부자 소리를 듣고 있지만 스스로 경계하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재물을 3대 이상 유지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했다.일찍이 사마천은 고대 중국의 부자들에 관한 이야기인 『화식열전(貨殖列傳)』을 지으면서 사람의 마음이란 “상대방의 재산이 자신보다 열 배 많으면 몸을 낮추고, 백 배 많으면 두려워하고, 천 배 많으면 그 사람이 시키는 일을 하고, 만 배 많으면 그 사람의 하인이 된다”고 했다.그러나 또한 재물에는 정해진 주인이 없기 때문에 “능력이 있으면 재물이 모이고, 능력이 없으면 기왓장 부서지듯 흩어진다”고도 했다.비록 재물이 주는 권력과 위세가 크다고 해도 그것을 지켜낼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3대를 지켜내기가 어렵다는 얘기다.
재물은 3대를 지키기 어렵다! 굳이 수 백 년 전 사람인 변승업이나 수천 년 전 사람인 사마천의 경우를 들지 않더라도 당대에 힘겹게 이룬 부와 권력이 아들 혹은 손자 대에 이르러 모래성처럼 무너진 사례는 무수히 많다.
이 때문에 예부터 창업보다 수성이 더 어렵다고 하지 않았던가? 즉 나라와 기업을 새로이 일으켜 세우는 일보다 지속가능한 발전과 성장이 더 힘들다는 말이다.기업의 지속가능한 발전과 성장에 대해 논의할 때 가장 중요한 전략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인재경영이다. 인재를 얻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기업의 성공과 실패가 판가름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인재라고 할지라도 오너 혹은 경영자를 잘 만나지 못하면 자신의 재주와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없다. 제갈량과 같은 불세출의 천재 지략가도 오너를 잘못 만나면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없는 법이다.우리 사회는 다른 어떤 곳보다 가족의 기업 경영이 널리 확산되어 있다. 이것이 옳은가 그른가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논할 문제가 아니다. 단지 자식에게 경영권을 계승하는 질서가 상식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기업 문화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인재 경영 전략이 다름 아닌 ‘자식 교육’이라는 사실이다.핵심 인재를 찾는 일 못지않게 핵심 인재를 알아볼 수 있는 자질과 안목, 기업의 자산을 증식하는 일 못지않게 기업의 자산을 관리할 줄 아는 식견과 지혜를 자식(경영 계승권자)에게 길러주는 일이 중요하다는 말이다.이 경우 조선의 부자들 중 가장 좋은 스승은 아무래도 개성상인인 듯싶다. 개성상인은 아무리 재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자신의 가업을 이어받을 자식을 다른 상인의 상점에 사환(심부름꾼)으로 맡겨 밑바닥 현장에서부터 경영 수업을 쌓고 스스로 상점을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자녀 교육’을 시켰기 때문이다.그렇다면 개성상인 이외에 자식교육으로 성공한 조선의 부자로는 누구를 추천할 수 있을까? 필자는 철저한 자식 교육을 통해 영남 일대에서 12대 300년 동안 만석꾼의 명성을 누린 경주 최부잣집을 대표적으로 꼽고 싶다.경주 최부잣집은 신라 최고의 천재이자 명문장가인 최치원의 후손이다. 이들은 17세기 무렵 최치원의 17대손인 최진립과 아들 최동량, 손자 최국선을 거치면서 크게 재물을 모아 20세기 중엽 최준에 이르기까지 무려 12대 300년 동안 만석꾼의 지위를 지켰다.경주 최부잣집이 만석꾼의 재산을 지키고 키운 300년의 세월 동안 조선은 온갖 사회적 혼란과 식민과 전쟁의 역사를 겪었다. 한 마디로 부자들은 재물은커녕 자신의 목숨조차 지키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가훈 ‘육훈(六訓)’과 처세법 ‘육연(六然)’ 그럼에도 이들이 만석꾼의 재산을 지키고 또한 키울 수 있었던 비결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집안을 다스리는 가훈인 ‘육훈(六訓)’과 자신을 다스리는 처세법인 ‘육연(六然)’을 원칙으로 삼아 자식들을 가르치는 최 부잣집만의 독특한 ‘자식 교육 시스템’에 있었다.
이 교육 시스템을 통해 경주 최 부잣집은 자식들을 재물은 물론 자신을 관리하고 경영할 줄 아는 핵심 인재로 길러낼 수 있었다.먼저 육훈(六訓) 즉 집안을 다스리는 여섯 가지 가훈부터 살펴보자.육훈의 첫째는 “과거를 보되 절대로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경제적 부가 커지면 보통의 경우 권력을 탐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부와 권력을 함께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은 역사의 철칙이다.경주 최 부잣집은 부를 지키기 위해서는 절대로 정치권력과 유착하거나 권력투쟁에 휘말리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자식들에게 철저하게 가르쳤다.둘째는 “재물은 1년에 만 석 이상 모으지 말라”이며, 셋째는 “흉년에는 다른 사람의 땅을 절대로 사지 말라”는 것이다.지나치게 욕심을 부려 남의 원망을 사면서까지 재물을 모으는 일은 곧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門)이자 목숨을 빼앗아가는 칼과도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넷째는 “손님이 찾아오면 신분과 귀천을 구분하지 말고 후하게 대접하라”는 것이다. 이 가훈을 통해 경주 최 부잣집은 자손들에게 “작은 돈은 내가 벌지만 큰돈은 남이 벌어 준다”는 말의 의미를 가르쳤다.다섯째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는 것이다. 부자가 되면 집안사람 중 누군가는 교만하고 게을러지는 어리석음을 범하기 마련인데, 이때 이러한 유혹에 가장 쉽게 빠지는 사람은 대개 집안의 여자들인 경우가 많다.아무리 단속하고 경계를 해도 집안 여자들의 교만과 방종 탓에 큰일을 그르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경주 최 부잣집은 며느리 교육 또한 철저했다.여섯째는 “주변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다. 사회공헌만큼 든든하게 재물을 지켜주는 울타리는 없다.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동학농민봉기 이후 경상도 일대에는 부잣집만을 골라 터는 활빈당(活貧黨)이 활약했는데 오직 최 부잣집만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평소 주변 백 리 이내에 굶주린 사람을 보살피라는 집안의 가훈을 철저히 실천해 어느 누구의 불만과 원망도 사지 않았기 때문에 숱한 부잣집과 지주들이 활빈당의 습격을 받았지만 최 부잣집만은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이다.육훈과 함께 경주 최 부잣집이 자식들에게 가르친 육연은 몸가짐과 행동거지를 닦는 일종의 ‘처세철학’이라고도 할 수 있고 또 어떤 상황과 조건에 맞부딪치더라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일종의 ‘마인드 컨트롤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육연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첫째는 ‘자처초연(自處超逸)’으로, 어떤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고 스스로에게 초연하라는 것이다.둘째는 ‘대인애연(對人靄然)’으로, 다른 사람을 항상 온화하게 대하라는 것이다.셋째는 ‘무사징연(無事澄然)’으로, 할 일이 없을 때는 마음을 맑게 간직하고 있으라는 것이다.넷째는 ‘유사감연(有事没事敢然)’으로, 일을 당하면 겁내지 말고 용감하고 당당하게 대처하라는 것이다.다섯째는 ‘득의담연(忘形与世无争)’으로, 뜻을 얻어 성공을 이루어도 오히려 담담하게 행동하라는 것이다.여섯째는 ‘실의태연(愁苦泰然)’으로, 뜻을 잃어 실패했다고 해도 오히려 태연하게 행동하라는 것이다.경주 최 부잣집의 ‘육훈’과 ‘육연’은 오늘날 유행하는 자기개발과 경영 서적들에서 너나없이 강조하고 있는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니 오히려 최 부잣집의 오랜 역사가 담겨 있는 만큼 훨씬 더 깊고 넓은 경험과 노하우를 간직하고 있다.아마도 경주 최 부잣집의 여섯 가지 가훈과 여섯 가지 처세법만 잘 활용해도 자식을 훌륭한 경영자로 키울 수 있는 교육 시스템과 인재 경영 전략을 구축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그 말에 담긴 의미를 조금만 꼼꼼하게 살펴본다면 최 부잣집의 육훈이 곧 자녀 교육 시스템이고, 육연은 곧 인재 경영 전략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