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주=고전연구가] 아랍인을 권총으로 쏴 죽인 살인 사건으로 재판정에 서게 된 뫼르소는 처음에 재판정 안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보려고 복닥거리며 모여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평소 뫼르소가 그렇듯이 보통 사람들은 뫼르소에게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살인 사건의 범죄자가 되고 난 후에야 비로소 뫼르소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들의 관심은 단지 뫼르소의 범죄 행위일 뿐 그의 삶과 일상에 대한 관심은 아니다. 그의 삶과 일상에 대한 관심조차도 오직 살인 행위의 의도성과 계획성을 입증하는 도구로 사용될 뿐이다.
재판정 안의 뫼르소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아는 얼굴을 찾아서 말을 걸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 마치 같은 세계의 사람들끼리 서로 만난 것이 즐겁기만 한 무슨 클럽에라도 와 있는 것 같은” 생각에 어쩐지 자신은 “침입자 같고 남아도는 존재인 것 같다는 기묘한 느낌”을 받는다.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게 된 바로 그 순간 뫼르소는 오히려 자신을 ‘이방인’으로 느낀 것이다.
왜 뫼르소는 재판정 안 자신을 ‘이방인’으로 느꼈던 것일까. 이곳에서 뫼르소는 지금까지 자신의 삶과 일상 속에서 결코 느껴본 적 없는 ‘무관심과 고독’의 정체를 비로소 느끼게 됐기 때문이다.
뫼르소의 범죄 행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역설적이게도 뫼르소의 삶과 행위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이다. 뫼르소가 아랍인을 권총으로 쏜 행위는 그의 말대로 단지 “우연하게 일어난 사건”이었다. 레몽을 찌른 아랍인과 우연히 마주친 뫼르소는 작렬하는 햇볕 아래 아랍인이 꺼내는 칼의 강렬한 빛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을 뿐이다.
하지만 뫼르소에 대한 재판정 안 사람들(판사·배심원들·검사·변호사·신문기자들·증인들·방청객들)의 관심은 오로지 그의 살인 행위가 의도적이고 계획적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있다. 이러한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재판정 안 사람들은 심지어 뫼르소 어머니의 죽음과 장례식까지 다시 소환한다.
뫼르소는 자신의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그토록 관심을 가지면서 자신의 삶과 일상에 대해서는 그토록 무관심한 재판정 안 사람들 속에서 철저하게 고독한 존재, 즉 ‘소외당한 이방인’이었다.
뫼르소는 재판정 안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얼마나 미워하는가 느낄 수 있게” 되고 “처음으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뫼르소의 재판은 변호사의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사실이라지만 사실인 것은 하나도 없는” 재판이다. 그 재판은 뫼르소의 삶과 살인 행위 심지어 영혼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과 몰이해로 이루어진 재판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뫼르소가 유일하게 자신의 살인을 가리켜 단지 ‘불운’이라고 되풀이해서 증언해준 식당 주인 셀레스트에게 “한 인간을 껴안고 싶은 마음이 우러난 것은 그때가 생전 처음”이었다고 말하는 대목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도시인의 삶과 일상을 지배하는 타자에 대한 무관심과 고독에 익숙해져버린 뫼르소가 오래전 상실한 타자에 대한 소통과 공감 능력의 회복이라고 말이다.
재판이 막바지로 갈수록 뫼르소는 자신을 제쳐두고 무시한 채 사건을 다루는, 다시 말해 “자신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는” 재판의 부조리를 깨닫는다. 그리고 뫼르소는 ‘무관심과 고독’이 지배하는 부조리한 세계 속 자신의 생애에 대해 이렇게 외친다.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전 생애 동안 내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항시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도 오지 않은 세월을 거슬러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더 실감난 달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불고 지나가면서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이방인』, 민음사, 2011, p134)
최후의 순간 뫼르소는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정다운 무관심’. 이것이야말로 ‘타자에 대한 무관심과 고독’이라는 도시의 유령으로부터 우리가 탈주할 수 있는 하나의 해법이 아닐까. 그것은 타자에 대한 관심이 타자에 대한 간섭과 억압이 되지 않는 길을 일러준다. 타자의 타자성, 즉 개별자‧단독자로서의 개인의 고유한 특성, 인간의 자유로운 삶을 전제로 하는 공감, 소통, 연대 말이다.
구보씨가 말한 “인간 본래의 온정”, 타자에 대한 관심과 인정 그리고 타자와의 공감, 소통, 연대가 또 다르게 타자에 대한 지배·간섭·억압이 되지 않으려면 ‘정다운 무관심’이 필요하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