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속 민중의 삶·민중의 삶 속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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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속 민중의 삶·민중의 삶 속 설화
  • 한정주 고전연구가
  • 승인 2023.11.20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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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인생수업]⑱ 일연 『삼국유사』…민중, 욕망하는 삶의 세계Ⅰ
1238년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되기 이전의 황룡사를 재현한 모형.
1238년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되기 이전의 황룡사를 재현한 모형.

[한정주=고전연구가]『삼국유사』에는 불교 신화(혹은 설화)가 다수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지은이 일연의 신분이 승려였기 때문일까. 그보다는 민중의 욕망이 불교와 관련한 신화(혹은 설화)를 무수히 창작해 민간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는 절대적인 힘(혹은 존재)에 의지해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구원을 얻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낳은 산물이다. 삼국 시대 불교 역시 그랬다. 삼국 시대 민중들은 불력(佛力)에 의지해 현실 세계의 고통·공포·불안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또한 불법(佛法)에 의뢰해 자신들의 안전·소망·희망·행복을 기원했다. 그리고 불교의 극락세계에 기대어 내세의 구원을 갈망했다.

이러한 욕망·욕구·갈망이 불교와 관련한 신화(혹은 설화)를 무수하게 창작하는 동력 역할을 했다. 특히 삼국 중 불력·불법·극락세계에 대한 민중의 욕망이 가장 강력하게 작용했던 곳은 신라였다.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불교 신화(혹은 설화)의 창작자 역시 대부분이 신라 사람이다.

고구려·백제·신라 중 가장 약소국은 신라였다. 더욱이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는 물론 북쪽으로는 말갈 그리고 동남쪽으로는 왜국 등 사방팔방에서 외적의 침략을 받아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강대한 외적의 끊임없는 침략과 약탈 때문에 신라 사람들은 항상 생업과 생계를 위협받고 죽음과 멸망의 공포와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이러한 삶의 고통·공포·불안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몸부림친 신라 사람들의 욕망과 갈망이 만들어낸 불교 신화(혹은 설화)가 바로 ‘황룡사 장륙존상’, ‘천사옥대’, ‘황룡사 9층탑’, ‘사천왕사’, ‘만파식적’ 이야기이다.

이들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창작된 불교 신화(혹은 설화)는 진흥왕 시대 황룡사 장륙존상(丈六尊像) 이야기이다. 장륙존상은 고대 인도에서 불교의 전성시대를 주도한 아소카 왕이 신라에 보낸 금과 철로 주조했다고 전해지는 불상이다.

아소카왕은 인도 최초의 통일대제국을 일으킨 강력한 제왕이었다. 또한 아소카왕은 불교의 역사에서 불법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불릴 만큼 신적인 존재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륙존상 설화는 아소카왕의 절대 권력과 종교적 권위에 의지해 신라의 위세와 위엄을 온 세상에 과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하겠다.

장륙존상은 황금 1만198푼에 무게가 3만5007근 그리고 길이가 여섯 길에 달하는 거대한 불상이었다고 한다. 황룡사 장륙존상은 천사옥대, 황룡사 9층탑과 더불어 신라를 지켜주는 3대 보물로 불렸다.

천사옥대(天賜玉帶)는 진흥왕과 진지왕에 뒤이어 왕위에 오른 진평왕 시대 만들어진 불교 신화(혹은 설화)이다. 특히 천사옥대는 다른 불교 신화(혹은 설화)에 비해 종교적 색채가 비교적 약한 편이다. 그런 까닭은 민간에 아직 토속 신앙과 불교 신앙이 혼재된 시대에 창작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진평왕이 즉위한 원년에 천사가 궁궐 뜰에 내려와 왕에게 말했다. ‘상황(上皇)께서 나에게 이 옥대를 전해 주라고 명하셨소.’ 왕이 친히 무릎을 꿇고 옥대를 받자 천사는 하늘로 올라갔다. 모든 교묘(郊廟)의 큰 제사에는 이 허리띠를 맸다. 훗날 고구려 왕이 신라 정벌을 꾀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 침범할 수가 없다고 하는데, 무엇을 말하는가?’ ‘황룡사의 장륙존상이 하나요, 그 절의 9층 탑이 둘이요, 진평왕의 천사옥대가 셋입니다.’ (고구려 왕은) 이에 정벌 계획을 멈췄다.”(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기이 제1」 ‘하늘이 내려준 옥대’, 2008, 민음사, p98〜99)

그럼 황룡사 9층탑 신화(혹은 설화)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이 불교 신화(혹은 설화)는 신라가 건국 이래 최대의 국가 위기에 놓여 있을 때 만들어진 것이다. 때문에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나라와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신라 민중의 욕망과 갈망이 가장 강력하게 담겨 있는 신화(혹은 설화)이다.

중국에 유학을 간 자장법사가 어느 날 태화지(太和池) 둑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나타난 신령한 사람이 “너희 나라에는 어떤 어려움이 있는가?” 라고 물었다. 이때 자장법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나라는 북쪽으로는 말갈과 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왜와 이어져 있으며,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가며 국경을 침범하여 이웃의 침입이 잦으니 이것이 백성의 고통입니다.”(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탑상 제4」 ‘황룡사의 9층탑’, 2008, 민음사, p307)

자장법사의 말을 듣고 있던 신령한 사람은 신라 황룡사의 호법룡(護法龍)이 자신의 큰아들이라고 하면서 신라로 돌아가서 절 안에 9층탑을 세우라고 한다. 그렇게 한다면 나라와 백성에게 큰 이로움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본국으로 돌아가서 절 안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들이 항복하고 동방의 아홉 나라가 와서 조공을 바치며 왕 없이도 영원히 편안할 것이다. 그리고 탑을 세운 후에 팔관회(八關會)를 열고 죄인을 풀어 주면 밖의 적이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다.”(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탑상 제4」 ‘황룡사의 9층탑’, 2008, 민음사, p307)

유학을 떠난 지 7년 만에 신라로 돌아온 자장법사는 선덕여왕에게 황룡사 안에 9층탑을 세울 것을 권유했다. 선덕여왕은 즉시 여러 신하들과 의논했다. 신하들은 신라에는 탑을 세울만한 기술자가 없기 때문에 반드시 백제에 부탁해 공장(工匠)을 데려와야 탑을 완공할 수 있다고 건의했다. 9층탑의 건축 과정과 탑이 완성된 후 신라에 나타난 영험한 효력에 대해 『삼국유사』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덕왕은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 백제로 가서 공장을 청하게 했다. 아비지라는 공장이 명을 받고 와서 재목과 돌을 다듬고 이간 용춘이 수하 공장 200명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했다. 처음 이 탑의 기둥을 세우던 날 아비지는 백제가 망하는 형상을 꿈꾸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의심이 되어 손을 떼려 했다. 그러자 갑자기 대지가 진동하고 사방이 캄캄해지더니 한 노승과 장사가 금전문(金殿門)에서 나와 그 기둥을 세우고는 모두 사라져버렸다. 공장은 뉘우치고 탑을 완성했다. … 탑을 세운 이후에 천지가 태평하고 삼한이 통일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험함이 아니겠는가?”(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탑상 제4」 ‘황룡사의 9층탑’, 2008, 민음사, p308〜309)

자신들의 욕망과 갈망이 만들어낸 이들 불교 설화(혹은 신화)를 통해 신라 사람들은 아무리 강대한 외적이 침략한다고 해도 천사옥대, 황룡사 9층탑 그리고 장륙존상이 건재하는 한 신라는 멸망하지 않는다는 믿음과 자신들의 안전과 생명 역시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러한 믿음과 확신에 의지해 외적의 침략과 약탈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얻지 않았을까.

그것이 바로 민중의 욕망이 만든 신화(혹은 설화)의 살아 있는 힘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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