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주=고전연구가] 1980년대 초·중반 학창 시절을 보낸 우리 세대가 공유한 최고 즐길 거리 중의 하나는 주말에 TV에서 방영하는 외국 영화였다. 아마도 누구나 그때 MBC 주말의 명화나 혹은 KBS 명화극장에서 본 영화 속 인상적인 장면 하나 정도는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필자의 경우는 그레고리 펙 주연의 흑백영화 <백경> 속 에이해브 선장의 모습이 그렇다. 얼굴에 번개 흉터를 달고 지팡이를 휘두르며 자신의 한쪽 다리를 먹어치운 거대한 흰고래 ‘모비 딕’을 추격하는 에이해브 선장의 광기어린 모습은 오랜 세월 필자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수수께끼처럼 남아 있었다.
‘왜 그는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그토록 지독하리만치 ‘모비 딕’에게 집착할까? 왜 그는 결코 정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토록 치열하게 ‘모비 딕’을 향해 돌진하고 또 돌진할까?’ 이런 의문이 필자의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의문은 다시 이런 질문을 낳았다. “에이해브 선장에게 거대한 향유고래 ‘모비 딕’은 도대체 어떤 존재 이길래?” 삶의 단 맛과 쓴 맛을 겪고 난 40대 중반 무렵 이 질문에 대한 필자 나름의 답을 찾기 위해 집어든 책이 영화 <백경>의 원작 소설인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이었다.
『모비 딕』은 에이해브 선장이 지휘하는 포경선 ‘피쿼드’호의 선원 이슈메일이 화자로 등장해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슈메일에게 『모비 딕』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 즉 에이해브 선장은 ‘피쿼드’호의 이등항해사 스터브의 말처럼 “수수께끼로 가득 찬 사람”이다. 이슈메일은 포경선 ‘피쿼드’호에 승선한 지 한참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조우한 에이해브 선장의 첫 인상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피쿼드’호의 뒷갑판 양쪽, 뒷돛 밧줄 가까이에 있는 널빤지에 지름이 1.5센티미터쯤 되는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는 고래뼈로 만든 다리를 그 구멍에 끼우고, 한 손을 들어서 밧줄을 움켜잡고 꼿꼿이 서서는, 끊임없이 곤두박질하고 있는 뱃머리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앞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 두려움 모르는 눈길에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불굴의 정신, 단호하고 양보할 수 없는 무한한 고집이 담겨 있었다. … 그에게서는 어떤 강력한 슬픔이 지닌 위엄,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당당하고 압도적인 위엄이 풍기고 있었다.”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모비 딕』, 작가정신, 2011, p171)
이슈메일이 묘사한 에이해브 선장의 인상은 오랜 세월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정복당하지 않는” 거대한 바다 괴물과 싸워온 그의 지난 삶, 즉 고통, 절망, 공포, 슬픔, 투지, 고집, 투쟁 등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모습이다.
미국 동부 낸터컷 항을 떠난 ‘피쿼드’호가 얼음과 빙산을 뒤로 하면서 열대 해역의 문지방으로 들어가 이미 대양 한가운데로 나왔을 때, 에이해브 선장은 모든 선원을 고물 쪽에 집합시켜놓고 마침내 이 ‘항해의 숨은 목적’을 목청 높여 외쳤다.
“이마에 주름이 잡혀 있고 아가리가 우그러진 고래를 발견하는 자, 대가리가 희고 오른쪽 꼬리에 구멍이 세 개 뚫린 고래를 발견하는 자, 그흰 고래를 발견하는 자에게 이 금화를 주겠다. … 흰고래다. 흰고래. 눈을 크게 뜨고 흰고래를 찾아라. 하얀 물을 유심히 살펴라. 거품만 보아도 소리쳐라. … 나는 희망봉을 돌고 혼 곶을 돌고 노르웨이 앞바다의 소용돌이를 돌고 지옥의 불길을 돌아서라도 놈을 추적하겠다. 그놈을 잡기 전에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대륙의 양쪽에서, 지구 곳곳에서 그놈의 흰 고래를 추적하는 것, 그놈이 검은 피를 내뿜고 지느러미를 맥없이 늘어뜨릴 때까지 추적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항해하는 목적이다.”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모비 딕』, 작가정신, 2011, p214〜216)
자신이 지휘하는 ‘피쿼드’호는 돈벌이를 위해 고래잡이를 하는 단순한 포경선이 아니라 오직 ‘모비 딕’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흰고래를 추격해야만 하는 포경선이라는 것이다. 에이해브 선장은 이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자신을 도와달라고 선원들에게 호소한다.
하지만 이미 망망대해 한가운데로 나선 ‘피쿼드’호의 모든 선원들에게 에이해브 선장의 광기어린 호소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을 지닌 지시이자 명령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