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寓話)의 철학자 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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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寓話)의 철학자 장자
  • 한정주 기자
  • 승인 2024.10.14 07: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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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인문학] ‘올바른 삶’이 아닌 ‘좋은 삶’을 사는 지혜

장자(莊子)는 전국시대 송(宋)나라 몽(蒙) 출신으로 제자백가 중 도가(道家)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본명은 장주(莊周)이고 자는 자휴(子休)다.

[헤드라인뉴스]는 장자 철학을 통해 절대적·보편적·객관적 기준에 의한 ‘올바른 삶’이 아니라 ‘자신만의 삶’,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사색하고 탐구해 나가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편집자 주>

장자

[한정주=고전연구가] 장자의 철학은 ‘우화의 철학’이다. 다른 철학자와 달리 장자는 자신이 지어내고 꾸며낸 이야기를 통해 세상에 자신의 철학적 메시지를 전한다. 그럼 장자가 일부러 지어내고 꾸며낸 우화들을 통해 전하고자 한 철학적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올바른 삶’이 아닌 ‘좋은 삶’을 사는 방법과 지혜이다. 올바른 삶과 좋은 삶의 차이는 무엇인가.

첫째, 올바른 삶에는 절대적·객관적·사회적 기준이 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적용되는 혹은 적용돼야 하는 기준이다. 하지만 ‘좋은 삶’에는 애초에 그런 기준이 없다.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상대적·주관적·개인적 기준일 뿐이다.

둘째, 올바른 삶은 자신의 가치와 기준을 누구도 예외 없이 적용하려고 한다. 그래서 자기 삶의 가치와 기준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고 또한 무한히 확대 복제하려고 한다. 반면 좋은 삶은 자신의 가치와 기준이 고유하듯이 다른 사람의 가치와 기준 역시 고유하다고 여긴다. 따라서 자기 삶의 가치와 기준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단지 각자 다른 삶의 가치와 기준을 존중할 뿐이다.

셋째, 올바른 삶은 세상(천하)의 가치와 기준을 위해 개인의 가치와 기준은 희생당할 수도 있다고 여긴다. 예를 들어 세상의 도덕과 규범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자유와 생명은 희생당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좋은 삶은 세상의 가치와 기준을 위해 개인의 가치와 기준이 희생당하는 것을 거부한다. 세상(천하)을 위해 희생당해도 괜찮은 개인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천하)을 위하는 삶이 ‘올바른 삶’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세상(천하)을 위해 개인의 삶과 생명을 해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장자에게는 공자나 묵자처럼 세상 사람들이 성인군자(聖人君子)라고 숭배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이다. 그것은 장자가 유가나 묵가를 비판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이다. 임금과 나라를 위하는 삶이 ‘올바른 삶’이라고 외치는 사람은 임금과 나라를 위해 개인의 삶과 생명을 희생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장자에게는 역사책을 가득 채우고 있는 충신(忠臣)과 지사(志士)가 그런 사람들이다. 선행과 정의를 위한 삶이 ‘올바른 삶’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선행과 정의를 위해 개인의 삶과 생명을 해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장자에게는 선행과 정의를 위한다고 온몸을 불사른 열사(烈士), 의사(義士), 열녀(烈女), 의녀(義女)가 그런 사람들이다. 그것은 장자가 인의도덕(仁義道德)과 삼강오륜(三綱五倫) 같은 관습, 도덕, 윤리, 규범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비판하는 이유이다.

예를 들어보자. 삼강오륜 같은 유학(성리학)의 이념이 지배하던 시대 여성에게 ‘올바른 삶’의 도덕과 규범은 무엇이었는가. ‘삼종지도(三從之道)와 불경이부(不更二夫)’다. ‘삼종지도’란 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를 따르고, 결혼한 후에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으면 자식을 따른다는 것이다. ‘불경이부’는 두 남편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편과 헤어지거나 혹은 남편이 죽더라도 평생 정절을 지키며 혼자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그 시대 여성들에게 요구되는 ‘올바른 삶’이었다. 그런데 ‘올바른 삶’의 관점에서 보면 여성의 삶은 남성에게 종속된 삶일 뿐이다. 여기에는 여성 자신의 삶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올바른 삶과 다른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결혼 전에도 아버지가 아닌 자신이 원하는 삶을 따르고 결혼 후에도 남편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삶을 따르고 남편이 죽은 후에도 자식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삶을 따르는 것이다. 불경이부, 즉 평생 남편에게 의리를 지키는 삶이 ‘올바른 삶’이라면 ‘좋은 삶’은 자신이 원하는 삶 다시 말해 자신의 행복과 사랑을 찾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도덕이나 규범 또는 그 밖의 어떤 것에 종속된 삶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고 바라고 갈망하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좋은 삶’이다. 그런 의미에서 ‘올바른 삶’이란 누구에게나 적용돼야 할 절대적·객관적·사회적 기준이라면 ‘좋은 삶’이란 자기 자신에게만 적용되는 상대적·주관적·개인적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올바른 삶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결정한 것이면 좋은 삶이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 결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장자의 관점에서 해석하자면 ‘올바른 삶’은 도덕과 규범의 노예로 사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도덕과 규범이 정한 올바른 삶의 가치·기준·질서에 구속·속박받거나 지배·통제당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반면 ‘좋은 삶’은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사는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스스로 정한 가치·기준·질서에 따르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올바른 삶이 곧 좋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왜 이런 착각이 일어나는가. 태어날 때부터 올바른 삶에 학습되고 훈육된 결과 그것을 자신의 것인 양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내면화된 도덕과 규범이 그런 판단·선택·결정을 하도록 한 것인데 자신이 주체적으로 판단·선택·결정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올바른 삶을 선택하면서 ‘올바른 삶이 좋은 삶이고 좋은 삶이 올바른 삶’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하지만 외부의 강요 또는 사회적 시선 때문에 올바른 삶을 선택했든 아니면 자발적으로 올바른 삶을 선택했든 둘 다 올바른 삶의 도덕과 규범에 종속되고 복종한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전자가 강압적 복종이라면 후자는 자발적 복종이라는 차이밖에 없다.

장자는 ‘올바른 삶’이 지배하던 시대 ‘좋은 삶’을 주장한 거의 유일한 철학자이다. 올바른 삶이 지배하면 어떻게 될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다투는 논쟁이 멈추지 않고, 그것에 따라 선과 악, 정의와 불의를 가리고 따져서 공격하는 분쟁이 그치지 않게 된다. 장자에게는 유가와 묵가가 ‘올바른 삶’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철학이다. 이 때문에 유가와 묵가의 철학은 온통 ‘무엇이 올바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견해와 주장의 다툼, 즉 논쟁과 분쟁으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장자의 시대만 ‘올바른 삶’이 지배한 시대는 아니다. 장자 이전 시대에도 그랬고 장자 이후 200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올바른 삶’의 도덕과 규범을 강요받고 그것에 복종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자신에게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과 질문 자체를 스스로 원천 봉쇄한 채 살아가고 있다.

다른 누군가의 삶이 아닌 자기 자신의 삶을 위해서 혹은 무엇인가의 노예가 아닌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려면 무엇보다 먼저 자신에게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를 스스로 질문하고 탐구해야 한다. 장자는 삶의 거의 모든 문제에서 ‘올바른 삶’을 거부하고 ‘좋은 삶’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탐구한 철학자이다. 이 때문에 장자의 철학은 ‘좋은 삶’을 추구하고 모색하는 필자와 같은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길잡이가 된다.

앞으로 연재하는 글에서는 장자가 질문하고 사색하고 탐구한 삶의 문제들을 추적하면서 그가 말한 ‘좋은 삶’의 방법과 지혜를 찾아가고자 한다. ‘운명, 욕망, 불안, 앎(지식), 삶과 죽음, 자유’ 등의 6가지 주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살면서 마주하는 또는 마주할 수밖에 없는 문제 가운데 삶에 가장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또한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장자 철학은 해답을 보여주지 않는다. 단지 해답을 찾아가는 길을 보여줄 뿐이다. 그 길을 걸어갈지 말지는 각자의 선택이고, 그 길을 걸어가는 과정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 그렇지 못할지 역시 각자의 몫이다. 필자 역시 장자를 통해 본 삶의 길을 따라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 중의 하나일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장자는 ‘하나의 장자’만이 아닌 ‘수천수만의 장자’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해야 한다. ‘하나의 장자’를 찾으려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장자가 아닌 장자’를 찾는 것이다. 장자 철학을 통해 절대적이고 영원히 변치 않는 ‘올바른 삶’을 찾으려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각자 개인이 찾아야 할 ‘좋은 삶’을 부정하고 파괴하고 해체하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처음부터 끝까지 장자는 절대적이고 영원불멸하다고 이름 붙은 세상의 모든 것을 철저히 부정하고 파괴하고 해체하려고 한 철학자였다는 사실을 한시도 놓쳐서는 안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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