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주=고전연구가] 춘추전국시대 정나라에 사람의 운명을 귀신처럼 기가 막히게 잘 맞추는 계함이라는 무당이 있었다. 계함은 사람의 화복(禍福), 수명, 요절, 삶과 죽음, 흥망성쇠 등의 운세는 물론 미래의 날짜까지 정확히 맞춰서 정나라 사람치고 그를 두려워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호자의 제자인 열자는 계함을 만난 후 사람의 앞날을 읽는 그의 능력에 완전히 심취하게 되었다. 스승 호자를 찾아간 열자는 ‘예전에는 선생님의 가르침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이제 선생님보다 더 뛰어난 사람을 만났다’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계함을 칭송했다.
묵묵히 제자의 말을 듣고 있던 호자는 ‘너는 내 가르침의 껍데기만을 갖고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성급히 인정을 얻으려고 한 탓에 계함으로 하여금 관상을 쉽게 알아맞히게 한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에게 계함을 한번 데려와 보라고 말한다.
다음날 열자는 계함을 데리고 호자를 찾아갔다. 호자를 만난 계함은 밖으로 나와 열자에게 “당신의 스승은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 나는 그에게서 젖은 재의 괴이한 모습을 보았다”고 일러준다.
스승이 죽는다는 말에 너무 놀란 열자는 울면서 되돌아가 호자에게 계함의 예언을 알려준다. 그런데 호자는 마치 계함의 예언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담담하게 이렇게 말한다.
“조금 전 나는 계함에게 대지의 무늬를 보여주었다. 멍한 모습으로 움직이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으니 그는 나의 생기(生氣)가 막혀버린 모습을 보고서 곧 죽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면서 호자는 열자에게 다음날 다시 계함을 자신에게 데리고 오라고 말한다. 다음날 다시 호자를 만나 관상을 본 계함은 밖으로 나와 열자에게 “다행히 그대의 선생은 나를 만난 덕에 병이 다 나았다. 어제 나는 그대의 선생에게서 생기가 막혀버린 관상을 보았기 때문에 곧 죽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오늘은 생기가 완전히 회복되었다.”
계함이 돌아가자 기쁜 마음에 열자는 즉시 그 말을 호자에게 알려주었다. 이번에도 호자는 계함이 그렇게 말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마치 예상했다는 듯 이렇게 답변했다.
“조금 전 나는 계함에게 하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명칭(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실질(내용)도 파악할 수 없는데 생기가 발뒤꿈치에서 발생하니 그는 나의 생기가 회복되었다고 말한 것이다.”
말을 마치자 호자는 열자에게 다음날 계함을 다시 자신에게 데리고 오라고 말한다. 다음날 세 번째로 호자를 만나 관상을 본 계함은 밖으로 나온 후 당황스러워하면서 열자에게 “오늘은 이상하게 그대 선생의 관상이 일정하지 않아서 도저히 관상을 볼 수가 없다. 다시 일정하게 관상을 잡아주면 그때 다시 관상을 보도록 하겠다”고 말하곤 그대로 돌아갔다. 열자가 계함의 말을 전하자 호자는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렇게 말한다.
“조금 전 나는 계함에게 더없이 허무하고 아무런 조짐도 흔적도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나의 모습에서 음과 양의 기운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거나 치우침 없는 평형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의 관상에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호자는 열자에게 계함을 또 데리고 오라고 말한다. 다음날 호자를 찾아간 계함은 그의 관상을 보고서 앉지도 못하고 얼이 빠진 채 그냥 서 있다가 그대로 뒤돌아서 도망을 쳤다. 호자는 열자에게 쫓아가서 계함을 잡아 오라고 외쳤다. 하지만 계함이 어찌나 빨리 달아났던지 열자는 그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빈손으로 돌아온 열자에게 호자는 계함이 도망친 까닭을 이렇게 말해준다.
“조금 전 나는 계함에게 자연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완전히 비우고 아무런 욕망도 없는 모습으로 그를 마주 대한 것이다. 이제 나의 관상을 본 계함은 내가 누군지 도통 알 수 없게 되었고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자 거대한 파도와 같은 무엇이 자신을 덮쳐서 무너뜨리려 한다는 생각에 두려워 도망친 것이다.”
이 우화는 『장자』 「내편」 ‘응제왕(應皇者)’에 실려 있다. 그렇다면 장자는 ‘호자와 무당 계함의 우화’를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한 것일까. 그것은 운명의 두 가지 본성이다. 그 하나가 ‘변화 가능성’이라면 다른 하나는 ‘예측 불가능성’이다.
우화 속 네 차례에 걸친 호자의 변신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운명의 본성을 상징한다면 호자의 관상이 변할 때마다 말을 바꾸다가 끝내 혼란에 휩싸여 도망친 계함의 모습은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의 본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장자는 사람의 운명이란 천변만화(千變萬化), 즉 무궁무진하게 변화하기 때문에 결코 예측할 수도 또한 단정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호자가 자신의 관상을 수시로 바꾸는 변신으로 무당 계함을 농락하는 우화로 꾸며서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