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터 가는 길]⑧ 왕 호위 좌청룡 우백호…암벽글씨로만 일부 남아
스스로 ‘무명자(無名子)’라고 불렀던 조선 후기의 문신 윤기(尹愭)의 시문집인 『무명자집(無名子集)』에는 그의 나이 51세 때인 1791년(정조15년) 동대문에 올라 도성을 돌아본 경치와 정취를 읊은 시(詩)가 수록돼 있다. 낙산에서 백악산(북악산)을 거쳐 인왕산에 이르기까지 도성을 휘감은 여정은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펼쳐놓은 듯하고 봄날 활터의 풍경도 등장한다.
麗景深春好 햇살 고운 늦봄의 경치가 아름다워
閑居幽興多 한가로운 생활 중에 흥취가 깊어지니
迨玆白日永 하루해가 길어난 오늘 이때에
陟彼靑門峨 우뚝한 동대문에 올라보노라
…(중략)…
傍瞻三角岫 옆으로 보이는 건 삼각산이요
遙帶五江波 저 멀리 두른 건 한강 물줄기
草樹紛蒙蔽 여기저기 더부룩한 풀숲 나무숲
雲煙相刮劘 맞닿아 넘나드는 구름과 안개
北巖穹棧磴 백악산(白嶽山)은 벼랑에 잔도(棧道)가 높고
西嶽攢矛戈 인왕산(仁王山)은 창을 모아 세운 듯하니
足慄危藤越 높은 덩굴 넘을 때면 발이 떨리고
魂招絶壁過 낭떠러지 지날 때면 혼이 나누나
…(중략)…
白闉纔暢豁 성곽의 흰 문이 시원스레 열리자
紫閣又巖阿 산굽이에 붉은 전각(殿閣)이 또 섰는데
粉鵠懸蒼樾 푸른 나무 그늘에 흰 과녁이 걸리고
紅蛾間綠蘿 초록 넝쿨 사이에 붉게 단장한 여인이 있네
…(하략)
시의 뒷부분에 등장하는 ‘붉은 전각(殿閣)’은 바로 ‘활터의 사정(射亭)’을 가리키는 말이다. 산굽이에 붉은색 사정의 활터가 있고 푸른 나무 아래에는 과녁이 걸려 있으며 초록으로 물든 주변의 각종 수풀 속에서는 붉은 옷을 입은 여인들이 봄을 만끽하고 있는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비단 윤기(尹愭)의 시뿐만 아니라 정약용의 『다산시문집』·『목민심서』 등을 비롯해 홍대용의 『담헌서(湛軒書)』, 허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성현의 『용재총화(慵齋叢話)』, 이수광의 『지봉집(芝峯集)』 등 여러 선비들의 시문(詩文) 곳곳에서는 활터가 자주 등장한다. 그만큼 주변에 활터가 많았고 활쏘기 구경이 일상이었다는 반증이다.
1929년 발간된 『조선의 궁술』에도 조선시대 한양 도성에는 27개의 민간 활터가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민간 활터의 유래는 전하는 바에 의하면 임진왜란 후에 선조대왕이 상무정신을 진흥하고자 하여 화재가 있었던 경복궁 동쪽 담장 안에 오운정(五雲亭)을 설치하고, 이것을 개방하여 백성들이 활쏘기를 할 수 있도록 장려하는 것이 민간 활터의 시초라고 한다.
그런 가운데 민간 활터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일시에 생겼는데 그 원인은 선조의 장려라기보다는 인조, 효종, 헌종, 숙종대의 각 시기별 무과시험이 열렸던 것이 큰 자극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오운정의 뒤를 이어 새로이 생긴 도성 내외의 모든 활터 가운데에서 오래된 활터를 보면 상촌(上村)의 백호정(白虎亭)과 하촌(下村)의 석호정(石虎亭), 서대문 밖의 노지사터(盧知事亭)와 강교(江郊)의 풍벽정(楓碧亭)이라 한다.
이 네 활터 외에 한성(漢城)의 민속적 구분에 따른 활터는 남촌(南村)의 상선대(上仙臺), 삼문교(三門橋)의 세송정(細松亭)·왜장대(倭將臺)·청룡정(靑龍亭)·읍배당(揖拜堂)이며, 북촌(北村)의 일가정(一可亭)·흥무정(興武亭)·취운정(翠雲亭)이고, 우대의 백호정의 뒤를 이은 풍소정(風嘯亭)·등룡정(登龍亭)·등과정(登科亭)·운룡정(雲龍亭)·쌍벽정(雙碧亭)·대송정(大松亭)·동락정(同樂亭)이다.
쌍벽정과 동락정을 제하고 5정(亭)을 ‘우대오터’라 하였으며, 아래대의 석호정(石虎亭)·좌룡정(左龍亭)·화룡정(華龍亭)·이화정(梨花亭)은 ‘아래대 네터’라 하였다. 서촌(西村) 서소문 부근의 이화정(梨花亭)과 동촌(東村) 동소문내의 율목정(栗木亭)·사반정(思泮亭)과 경희궁 안에 있는 경운정(慶雲亭)은 모두 도성 안의 활터이다.” <『새롭게 읽는 조선의 궁술』, 국립민속박물관>
흥미롭게도 『조선의 궁술』에 등장하는 활터 대부분이 윤기(尹愭)가 유람했던 길을 따라 도열해 있다. 조선 왕조는 태조3년(1403년) 한양 천도 당시 삼봉 정도전이 북악산(백악산)을 주산으로 좌청룡 낙산, 우백호 인왕산, 안산 남산의 지형을 갖춘 풍수적 명당자리에 경복궁을 설계했다. 즉 조선 왕조 정궁(正宮)인 경복궁을 좌우에서 호위하는 좌청룡·우백호 지형의 산세를 끼고 활터들이 들어선 것이다.
풍수학자 김두규는 저서 『논두렁 밭두렁에도 명당이 있다』에서 풍수에서 청룡은 남자·명예·벼슬·장남 등을 주관하는 기운이, 백호는 여자·재물·예술·차남 등을 주관하는 기운이 강한 것으로 해석한다고 말했다. 조선 왕실의 경우 ‘전통적으로 왕비가 더 오래 살거나 드센 반면 왕이나 왕자 가운데 장남·장손이 단명했다’는 야사의 내용도 같은 맥락으로 지적한다. 백호인 인왕산이 청룡인 낙산보다 더 크고 웅장하다는 점에서 비롯된 풍수적 관념이다.
어쨌든 이들 활터는 석호정을 제외하면 오늘날 모두 사라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거나 일부 바위글씨만 남아 그곳이 활터였음을 후세에 알리고 있다. 그 많던 활터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 갑오경장 이후 활터 폐쇄…활쏘기도 금지
한양 도성에서 활터가 사라진 것은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다. 조선시대 활쏘기는 유학이념을 뒷받침하기 위해 국가적으로 무인은 물론 글을 읽는 선비들에게도 적극 권장됐다. 특히 태종(太宗) 2년(1402년) 처음 무과가 시행되면서 완성된 과거제도는 식년시에서 경서에 관한 시험과 함께 무술시험을 치렀다.
식년시의 예비단계에서 응시자들은 240보 목전(木箭), 80보 철전(鐵箭), 130보 편전(片箭), 기사(騎射), 기창(騎槍), 격구(擊毬) 등 총 여섯 가지 무술 실력을 평가받았다. 즉 여섯 과목 중 기창과 격구를 제외한 나머지 네 과목이 모두 활쏘기였던 것이다. 결국 무과시험의 합격여부는 활쏘기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다.
엄격한 신분사회였던 조선시대에 무과시험 합격은 곧 신분상승의 기회이기도 했다. 때문에 무과시험 응시자격을 갖춘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활쏘기에 매달렸고, 이는 민간사정이 발달하게 된 배경이 됐다.
그러나 1894년 정부 주도로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변혁을 불러온 갑오경장을 계기로 활쏘기는 구습타파의 대상이 돼 급격한 퇴락의 길을 걷게 된다. 더구나 과거제도 폐지와 군제 개편으로 활이 군대의 무기체계에서 제외되면서 활쏘기를 통해 신분상승을 도모했던 이들이 활터를 떠나게 되고 활터마저 그 기능을 잃게 되면서 사라지고 만 것이다.
특히 갑오경장 이후 활쏘기가 단순히 백성들의 외면에서가 아니라 정부의 공권력이 동원된 강제적 금지라는 기록은 갑오경장 2년 후인 1896년(고종33년) 5월28일자 『독립신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달 15일 동소문 안 율목정에서 활을 쏘기로 경무 동서 심총순이 순검을 데리고 간즉 다 도망하고 새다리 최동환과 성균관 홍종혁을 잡아다 회유하여 보내고, 버리고 간 활 셋과 전통 세 개를 주워다가 그 임자 김석철 김재흥 김복림을 찾아 회유하고 내어 주었다더라.”
◇ 낙산 정상 부근 성곽 외벽의 바위글씨…좌청룡 역할 활터
2019년 새해 첫 달 미루고 미루었던 조선시대 활터의 흔적을 따라 서울 성곽길을 밟아나갔다. 욕심 같아서는 사라진 27개의 사정이 있던 자리를 모두 확인하고 싶었지만 연구를 직업으로 하는 이들조차 그 위치를 정확하게 짚어내지 못하고 있어 애초부터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결국 각종 문헌과 최근 자료를 뒤져 확인 가능한 우대 오터와 아랫대 네터를 중심으로 길을 잡았다.
연초부터 서슬 퍼런 날을 세우고 옷 틈을 파고들었던 겨울바람은 지친 기색을 드러내며 잠깐 동안 쉬어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언덕을 오르다 길모퉁이 바위에 걸터앉아 버거운 발걸음을 잠시 달래듯 잦아든 추위는 두툼한 겉옷을 오히려 거추장스럽게 했다.
윤기(尹愭)의 시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동대문에서 낙산(駱山)을 오르는데 도시는 이미 칙칙한 잿빛으로 덮여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대기가 정체되면 으레 미세먼지를 걱정해야 하고 화창하게 열린 파란하늘은 손으로 꼽을 정도이니 삼한사온(三寒四溫)이 삼한사미(三寒四微), 다시 말해 ‘사흘 춥고 나흘 미세먼지’로 바뀌어 겨울날씨를 일컫는 새로운 공식으로 굳어지고 있다.
낙산은 풍수지리적으로 경복궁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이다. 이를 염두에 두었을까. 동대문에서 20여분 성곽을 따라 오르자 마을버스 종점이 있는 정상 약 50여 미터 직전에 ‘左龍亭’이라는 해서체(楷書體)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성벽에 박혀있다. 아랫대 네터 가운데 한 곳인 좌룡정이 있던 자리다. ‘좌(左)’는 좌(佐)와 뜻이 통하고 용(龍)은 왕(王)을 상징해 좌룡은 바로 왕을 도와준다는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 좌청룡 의미와 같은 맥락이다.
한양도성박물관이 수집한 일제 강점기 제작된 사진엽서에는 3명의 궁사가 같은 위치에서 활쏘기를 하고 있는 모습도 확인된다. 사진엽서에서 만작하고 있는 궁사들은 성벽을 등지고 동쪽을 바라보고 있어 과녁이 설치된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 사대 우측은 남산으로 현재는 두타 건물과 DDP가 한눈에 들어온다.
다만 도성 안의 활터로 알려진 좌룡정의 사대와 무겁이 도성 밖에 설치돼 있다는 점이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다. 당시엔 성벽 안과 밖이 천지차이 아니었던가. 또한 좌룡정이 사정(射亭) 없는 노지(露地)활터라는 인식도 주고 있다.
일부에서 좌룡정 위치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이유다. 현재 바위글씨와 사진엽서 촬영 이전에는 도성 안쪽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도 있다.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서울의 누정』에서는 “정자는 이미 1907년 이전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면서 “1907년 5월10일자 『황성신문』에는 ‘의친왕 전하께서 동문 안 좌룡정 부근에 정자를 방금 세운신다더라’는 기사가 실려 있고 같은 신문 7월10일자에는 내각 서기관 이원용이 자신의 집 후원을 넓히는 과정에서 좌룡정 터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점을 들어 경무청에 경계를 정확하게 해줄 것을 청원하고 있다”는 기록이 근거다.
신문기사만 보더라도 의친왕과 이원용이 도성 밖에 정자와 후원을 만들 가능성은 없어 현재 바위글씨가 남아있는 좌룡정의 위치에 대한 문제제기는 설득력을 얻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