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무의 그림 같은 시…정선의 시 같은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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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의 그림 같은 시…정선의 시 같은 그림
  • 한정주 고전연구가
  • 승인 2021.05.24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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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 詩의 온도](71) 필운대
정선의 필운상화 (弼雲賞花), 1750년경, 종이에  엷은채색, 27.5x18.5cm, 개인소장.
정선의 필운상화 (弼雲賞花), 1750년경, 종이에 엷은채색, 27.5x18.5cm, 개인소장.

구름 개인 서쪽 성곽에 봄옷 차려입고 거니니          晴雲西郭試春衣
눈에 아른대는 아지랑이 백 길이나 날아오르네        眼纈遊絲百丈飛
연일 해 저물도록 늦어지는 것 사양 말라              連日莫辭成晼晩
꽃피어 이 놀이 얼마나 행복한가                       是遊何幸及芳菲
물고기 비늘 같은 만 채의 가옥 꽃향기 피어 오르고   魚鱗萬屋蒸花氣
연꽃처럼 솟아 있는 세 봉우리 햇무리를 품었네       蓮朶三峰抱日暉
경복궁의 땅 밝아 백조가 날아오르니                  景福地明翔白鳥
내 마음 너희와 더불어 노닐며 모든 걸 잊었네         吾心遙與爾忘機
『영처시고 2』 (재번역)

육각봉의 꽃놀이

사직골 동쪽 유달리 눈에 들어오는 곳에   社東殊眼境
햇빛 하얗게 초가집에 드리우네            日白蔭茅家
정중하구나 일찍이 노닐던 바위            鄭重曾遊石
이리저리 멀리서 꽃을 바라보네            周便遠看花
저녁 샘물은 유난히 깨끗하며 맑고         夕泉偏潔淨
한낮 나무는 제멋대로 기울었네            暄樹任欹斜
육각봉이란 이름 볼품없으니               六角峯名陋
아름다운 이름 붙이고 싶네                 欲將美號加

하늘 개고 나니 옷들도 참으로 곱고        天晴衣正麗
놀이꾼 떼 지어 집집마다 나오네           遊隊出家家
때맞추어 단비 흠뻑 오더니                 纔洽知時雨
제때 만난 꽃 두루 활짝 피었네             遍濃得地花
사직골 숲에는 푸른 아지랑이 엉기고       社林靑靄集
감투바위에는 자줏빛 석양 비스듬하네     官石紫暉斜
잔디는 깨끗하여 자리 깔 필요 없고        莎淨何煩席
누대 동쪽엔 기와 그림자 드리웠네         臺東影瓦加
『아정유고 1』 (재번역)

[한정주=고전연구가] 봄날 한양 인왕산 필운대와 육각봉의 꽃놀이와 꽃구경을 묘사한 시다. 필운대와 육각봉 주변 풍경과 꽃구경하러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다양한 색깔로 생동감 넘치게 표현하고 있다.

필운대는 현재 배화여고 교정 뒷산의 바위이고 육각봉은 필운대 옆의 언덕이다. 이덕무가 살던 당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던 한양도성 안 명승은 어디였을까? 유득공은 한양 풍속을 기록한 책 『경도잡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필운대의 살구꽃, 북둔의 복사꽃, 흥인문(동대문) 밖의 버들, 천연정의 연꽃, 삼청동과 탕춘대의 수석. 이곳으로 시가를 읊으며 술잔을 기울이는 풍류객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도성의 둘레는 40리이다. 하루 동안 두루 유람하면서 성 안팎의 꽃과 버들을 감상하는 것을 제일가는 놀이와 구경으로 여겼다.”

이덕무와 그 벗들은 필운대와 육각봉을 찾아 꽃놀이와 꽃구경을 즐기고 또한 시로 옮겼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의 작품 가운데 필운대와 육각봉의 꽃놀이를 묘사한 그림이 있다.

필운대에서 꽃을 완상(玩賞)한다는 뜻을 담은 ‘필운상화(弼雲賞花)’라는 제목의 그림으로 필운대와 육각봉에 둘러앉은 예닐곱 명의 선비가 살구꽃과 복사꽃 가득 핀 서촌의 봄날 풍경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여기 이덕무의 시가 필운대와 육각봉의 꽃놀이 풍경을 시로 묘사한 ‘진경 시’의 대표작이라면 정선의 그림은 필운대와 육각봉의 꽃놀이 풍경을 그림으로 묘사한 ‘진경산수화’의 대표작이다.

이덕무가 그림을 그리듯 시를 썼다면 정선은 시를 쓰듯이 그림을 그렸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덕무는 시와 그림의 관계를 항상 이렇게 말했다.

“그림을 그리면서 시의 뜻을 모르면 색칠의 조화를 잃게 되고 시를 읊으면서 그림의 뜻을 모르면 시의 맥락이 막히게 된다.”

조선의 산천 풍경을 생동감 넘치게 묘사한 18세기 조선의 진경산수화와 진경시의 미학은 마치 쌍둥이처럼 꼭 닮아있다. 그 미학은 바로 ‘그림 같은 시, 시 같은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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