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 잃은 궁궐의 현존 유일 활터…창경궁 관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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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잃은 궁궐의 현존 유일 활터…창경궁 관덕정
  • 한정곤 기자
  • 승인 2019.04.22 09: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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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터 가는 길]⑨ 역사가 감춘 오직 임금 한 사람만을 위한 사정(射亭)
▲ 창경궁 동북쪽 언덕의 관덕정. <사진=한정곤 기자>

[활터 가는 길]⑨ 역사가 감춘 오직 임금 한 사람만을 위한 사정(射亭)

북상하는 봄꽃들의 아우성이 지천이다. 날선 봄바람은 겨울옷에 대한 미련을 붙들지만 도처에 흐드러진 꽃들은 다투어 제철을 맞이한다. 심술궂은 봄비가 훑고 간 궁궐은 구름 낀 하늘이 무색하리만치 말끔하게 단장이라도 한 듯 선명한 자태를 드러낸다.

봄의 경치를 만끽할 수 있는 상춘(賞春)의 장소로 궁궐만큼 호사스런 곳이 또 있을까. 수백 년 전 궁궐의 주인이었던 조선의 왕들이 그랬듯 느릿느릿 재촉하지 않은 소걸음으로 울퉁불퉁 박석(薄石) 하나하나 밟아가며 주변 수목에 매달린 꽃들을 탐미하는 여유는 봄날 궁궐 산책에서만 누릴 수 있는 묘미다.

전각과 전각을 잇는 소로(小路)에는 듬성듬성 진달래꽃이 활짝 웃고 연못가에 축 늘어진 능수버들은 봄날 오후 햇살을 받아 춘곤증을 감추지 못한다. 몇 그루 남은 벚나무가 얼굴을 찌푸리게 하지만 그 역시 지나간 역사의 한 페이지일 뿐이다.

누군가 동행이 있으면 있는 대로, 또 없으면 없는 대로 나름의 맛도 다르다. 그러나 홀로 궁궐의 봄을 걷기에는 가을 단풍구경과 달리 어쩐지 처량하다. 봄은 떠들썩해야 맛이고, 가을은 호젓해야 맛이 아닌가.

▲ 춘당지에서 본 관덕정은 숲속에 가려있다 . <사진=한정곤 기자>

햇살 좋은 4월 초순의 오후 창경궁 꽃놀이에 동행한 신선미·이지후 여무사의 들뜬 표정은 영락없는 봄처녀다. 뒤따라오는 최문구·김종민 접장도 봄을 단단히 희롱하겠다는 기대와 각오를 다진다. 학창시절의 창경원을 기억한 신선미 여무사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궁궐의 달라진 풍광이 오히려 낯선 모양이다. 초등학교 시절 봄소풍 이후 처음이라는 최문구 접장도 놀라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창경궁의 봄을 있는 그대로 만끽하기엔 어딘가 가슴 한 구석에서부터 아련함이 밀려온다. 아마도 창경궁의 비극적인 지난 상처 탓일 게다. 조선의 궁궐은 모두 다섯 개였다. 경복궁과 그 옆의 창덕궁·창경궁 그리고 덕수궁과 경희궁이다. 이 가운데 창경궁은 가장 파괴가 심했던 궁궐이다.

창건 174년 후인 선조25년(1592년)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불타버렸고 광해군8년(1616년) 정궁(正宮)인 경복궁 대신 창덕궁과 창경궁을 먼저 재건했지만 인조2년(1624년) 이괄의 난과 순조30년(1830년) 대화재로 내전을 비롯한 많은 전각이 또 다시 소실됐다. 이후 복원과 중수를 거듭해 조선후기까지는 궁궐로서의 체면은 유지했지만 1909년 일제강점기 직전 창경궁 남쪽 마랑(馬廊) 터 일원의 건물 모두를 철거하고 동물원과 대온실이 들어선 뒤에는 급기야 창경원(昌慶園)이라는 놀이공간으로 바뀌는 수모까지 겪어야 했다. 1922년 화창한 봄날이었던 4월26일 자행됐던 만행이다.

원래 창경궁은 고려시대 남경(南京) 건물이 있던 자리로 조선 태조 때는 별궁(別宮)으로 불렸다. 이후 세종은 1418년 즉위한 그 해 태종을 위해 수강궁을 지었고 1483년(성종14년) 성종이 다시 건물을 증축하면서 창경궁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경복궁·창덕궁에 이어 세 번째로 지어진 궁궐이었지만 왕이 정사(政事)를 보기 위한 궁궐은 아니었다. 성종이 증축할 당시 할머니인 세조 비 정희왕후를 비롯해 어머니인 덕종 비 소혜왕후, 작은어머니인 예종 계비 안순왕후 등 권력에서 물러난 왕실 가족이 늘어나면서 좁아진 생활공간을 넓힐 목적이 더 강했다. 따라서 창경궁은 궁중 여인들을 위한 공간이었고 동시에 창덕궁의 보조궁궐로 모자라는 주거공간을 보완해 주는 기능을 담당했다.

◇ 인조가 세운 왕의 사정(射亭)
창덕궁 정문인 홍화문(弘化門)을 지나 우측 담장을 끼고 대온실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10여분 걸었을까. 어울리지 않은 거대한 유리온실이 정면에 나타나고 왼쪽에는 푸른 싹이 돋아나는 느티나무·회화나무·능수버들 등 각종 수목들이 에워싼 연못 춘당지(春塘池)가 누워있다. 1984년 창경궁 복원 이후 아직까지 지워지고 있지 않은 창경원의 흔적 두 곳이다.

▲ 관덕정 사대에서 본 남쪽. 과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춘당지 앞까지 수목에 시야가 가로막혀 있다. <사진=한정곤 기자>

여기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균관으로 통하는 오른쪽 집춘문(集春門) 쪽을 외면하고 창덕궁을 잇는 영춘문(永春門) 방향으로 직행한다. 그러나 대온실 동쪽, 춘당지 동북쪽 언덕을 바라보면 수목들 사이로 얼핏 정자의 윤곽이 드러난다. 현재 조선 궁궐에 남아있는 유일한 왕의 사정(射亭)인 관덕정(觀德亭)이다.

이곳에 처음 정자가 들어선 것은 인조20년(1642년)이었다. 병자호란(1636년)의 수모를 경험한 임금이 절치부심한 탓인지 북벌론(北伐論)이 비등했던 당시 공혜왕후 한씨가 잠례(蠶禮)를 거행하던 장소에 취미정(翠微亭)이란 이름의 활터를 세우고 활쏘기에 나선 것으로 알려진다. 이후 현종이 1664년 정자를 수리하고 이름도 관덕정(觀德亭)으로 바꾸었다.

취미정은 산의 중턱에 있는 정자라는 의미다. 춘당지 동북쪽 야산 언덕이라는 지형적 작명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현종이 바꾼 관덕정은 『예기(禮記)』 <사의(射義)> 편에 “활쏘기는 진퇴와 주선(周旋)이 반드시 예에 맞아야 한다. 마음이 바르고 자세가 곧아야 활과 화살을 잡을 때 바르고 안정되고, 활과 화살을 잡을 때 바르고 안정되어야 적중을 말할 수 있다. 활쏘기는 덕행을 살필 수 있다.(射者 進退周旋必中禮 內志正外體直 然後持弓矢審固 持弓矢審固 然後可以言中 此可以觀德行矣)는 말에서 유래한다.

관덕정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으로 겹처마 구조이며 화강석 기단을 깔고 초석을 놓아 기둥을 세웠다. 돌로 마감된 마루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마감했다. 벽과 문을 달지 않아 사방이 트여 있는 대(臺) 형태의 정자로 곱게 단청까지 돼 있지만 현판은 없다. 왕의 사정(射亭)이라기엔 의외로 초라하고 왜소하다. 아니면 소박하다고 해야 할까.

주변에는 단풍나무·참나무·소나무·느티나무 등 수목이 둘러쳐 숲을 이루고 있어 사방이 막혀 답답하다. 이곳이 정말 활을 냈던 사정(射亭)이 맞나 하는 의구심까지 들게 하는 지형이다.

▲ 순조 때 작성된 국보 제249호 『동궐도』. 오른쪽 언덕의 붉은색 원 안이 관덕정이다. 왼쪽 원 안은 창덕궁 영화당과 춘당대다.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273㎝, 가로 576㎝.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그러나 1830년 이전 순조 때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궐도』를 보면 비로소 고개가 끄덕여진다. 언덕 중턱 즈음 서 있는 사정(射亭) 주변으로는 수목이 전혀 없고 연못이 조성된 정면 멀리까지 그 어떤 장애물도 없이 시원하게 탁 트여 있다.

다만 정자의 구조는 다르다. 사면이 트여 있는 대(臺) 형태가 아니라 문을 달아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전형적인 정자 형태이며 뒤로는 보조행각도 배치돼 있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고 있는 창경궁이 과거의 그것과 얼마나 다른지를 확인할 수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증보판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卷2) 경도(京都) 궁궐(宮闕) 창경궁(昌慶宮)>에는 관덕정을 가리켜 “창경궁에 있는 일종의 사정(射亭)이다”고 활쏘기를 하는 정자라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 활 쏘고 술잔 기울이며 가을 단풍 구경한 정조의 풍류
『조선왕조실록』에는 보이지 않지만 조선 임금의 활쏘기 기록도 조선 후기의 문신 윤기(尹愭)가 1824년(순조24년) 84세 때 쓴 ‘형조참판 황공 행장(刑曹參判黃公行狀)’에 나타난다. 이 글에서 윤기는 숙종이 매일 같이 활쏘기를 했다고 적었다. 형조참판 황공은 조선시대 무관 벼슬을 했던 황징(黃徵: 1635~1713년)으로, 윤기는 그의 5세손인 황윤석(黃倫錫)의 부탁을 받고 이 글을 썼다.

“병진년(1676년·숙종2년)에 부호군 겸 내금위장(副護軍兼內禁衛將)에 제수되었다. 태복시 내승(太僕寺內乘)으로 있을 때 참판공이 연로한 나이로 고향에 있으니 공이 본도(本道: 충청도)의 벼슬자리를 하나 얻어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를 원하였다. 전관(銓官: 병조판서)이 공을 충청도 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 후보자 명단에 올렸으나 임금의 낙점은 받지 못하였다. 당시 상(임금)은 매일같이 금원(禁苑: 후원)의 관덕정(觀德亭)에 납시었는데, 공이 내승으로서 활 쏘는 법이 전아하고 활 솜씨가 화살이 같은 자리에 적중할 정도로 뛰어나자 상이 특히 사랑하여 멀리 내보내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명자집(無名子集)』 제14책>

▲ 왕의 사정(射亭)이라기엔 의외로 초라하고 왜소하다. <사진=한정곤 기자>

정조도 관덕정에 자주 발걸음을 하며 활쏘기를 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글이 남아 있다. 정조의 어제(御製)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 제1권 춘저록(春邸錄)과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에는 정조가 창덕궁 후원에서 느낀 아름다운 경치 열 곳을 정해 ‘상림십경(上林十景)’이라 하고 직접 지은 시가 수록돼 있다. 이 가운데에는 관덕정에서 활쏘기를 하고 술잔을 기울이며 가을 단풍을 구경하는 ‘관덕풍림(觀德楓林)’이 포함돼 있다.

畫鵠鳴時箭中心 화살이 과녁에 맞혀 적중소리 울릴 때
雲霞步障擁仙林 구름 노을이 병풍처럼 선경 숲 에워쌌네
三淸物色元如許 삼청 경물 빛 이와 같이 뛰어나서
樂與諸君醉不禁 여러 군(君)과 함께 즐겨 취하길 마다하지 않네

관덕정 앞 사대에 서서 춘당지 앞에 설치됐을 과녁을 향해 활쏘기를 하고 있는 정조의 모습이 그려진다. 정조는 이곳에서 습사를 하며 어떤 덕을 키우고자 했을까.

창경궁 관덕정을 가자고 했을 때 이지후 여무사는 활가방도 챙겨야 하느냐고 물었다. 아마도 궁궐에서의 활쏘기가 가능하리라는 기대에 부풀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이 아닌 신하인 걸 어떡하겠는가. 그런데 김종민 접장은 정말 활가방을 들고 왔다. 이왕 가져왔으니 빈활이라도 당겨본다며 관덕정 앞에서 거궁과 만작을 하는 모습이 어쩐지 처량하다.

관덕정을 돌아 나오면서 최문구 접장은 “문화재청과 같은 정부기관에서 1년에 한번쯤이라도 무과시험을 재현하는 행사를 마련해 실제 활쏘기가 가능할 수 있도록 한다면 전국의 활잡이들과 관광객들에게 그보다 더 멋진 경험은 없을 것”이라고 뼈 있는 한마디를 던진다.

주인 잃은 관덕정도 조선의 왕들이 활쏘기를 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지 않을까. 비록 옛 주인의 직계 후손은 아니더라도 활터 본연의 기능을 되찾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위안이 될 것이다.

▲ ‘대사례도(大射禮圖) 중 어사례도(御射禮圖)’, 1743년(영조19년) 윤 4월7일 거행된 ‘대사례(大射禮)’ 중 임금이 활 쏘는 모습을 담고 있는 ‘어사도(御射圖)’다. 비단에 채색, 60.0×282cm,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사실 관덕정은 아니었지만 지난 2006년 문화재청은 경복궁 홍례문 광장에서 조선시대 대사례의(大射禮儀)를 재현한 바 있다. 대사례는 조선왕조 통치 질서의 근간인 오례의(五禮儀) 중 군례(軍禮)에 속하는 것으로 왕과 신하가 활쏘기를 통해 군신(君臣)간의 예와 화합을 유지하고 군왕의 무예적 소양을 갖추기 위해 조선 초부터 거행된 의식이다.

당시 재현한 대사례는 1743년 음력 윤달 4월7일 영조가 성균관에 행차해 행한 문묘작헌례(文廟酌獻禮), 알성 문·무과시험과 합격자 발표 등 일련의 행사 중 대사례 부분만 재구성했다. 국왕에 대한 신하들의 하례의인 진하의(進賀儀), 국왕이 활을 쏘는 예인 어사례(御射禮), 문무백관이 활을 쏘는 예인 시사례(侍射禮), 상벌과 축하공연 등의 부대행사 등이 3일간 계속됐다.

◇ 임금의 대표적 활쏘기 장소였던 춘당대
조선시대 궁궐의 사정(射亭)은 관덕정만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는 경복궁에 오운정(五雲亭)이라는 사정을 만들어 누구나 활쏘기를 할 수 있도록 민간에까지 개방했으며 효종은 창경궁 내사복(內司僕)에 사정을 특설해 내승(內乘)과 별군직(別軍職) 등의 관리가 습사하도록 했다. 고종도 1868년 경복궁 내에 경무대(景武臺)를 설치해 문무(文武) 과시(科試)와 열무를 행하기도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희궁(慶熙宮) 회상전 동쪽 내원(內苑)의 별실로 융무당이 있었다”며 “남쪽의 대를 관사대(觀射臺)라 하고 북쪽의 정자를 봉황정(鳳凰亭)이라 하는데 모두 활쏘기를 익히고 무예를 연습하는 곳”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조선 왕들에게 이들 사정(射亭)은 별반 의미가 없었다. 궁궐 어디라도 과녁만 설치하면 그곳이 무겁이었고 왕이 서 있는 곳이 바로 사대였기 때문이다. 태조 이성계를 비롯한 조선의 여러 왕들도 궐내 곳곳에서 활쏘기를 했고 대표적인 연회 장소였던 경복궁 경회루에서까지 활쏘기를 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 곳곳에 등장한다.

『세종실록』 52권(세종13년 6월1일)에는 세종이 “경회루 아래에 나아가 활쏘기를 구경했다(御慶會樓下 觀宗親射侯)”고 기록돼 있다. 세종은 경회루를 가장 많이 찾고 활용한 임금이었다. 사신맞이는 물론 종친과 신하들을 위한 연회도 자주 베풀었고 가뭄 때는 기우제도 경회루에서 올렸다. 또한 무과시험을 주재해 활쏘기 시범을 관람한 곳도 경회루였다.

중중 역시 “경회루에서 활쏘기를 관람한 후 1등을 한 내금위 허광필을 승진시켜 주었다(御慶會樓觀射 內禁衛許光弼居首 命加一級)”고 『중종실록』은 전한다. 세조는 경회루 연못 너머에 과녁을 설치하고 자주 활을 쏘았는데 화살이 연못에 하나도 빠지지 않았다는 기록도 전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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